지금, 여기 와있으나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이슈들
위작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함께한다. (서구로만 범위를 한정하면) 일찍이 고대 페니키아인들은 이집트 테라코타가 인기를 끌자 잽싸게 위조품을 만들어 팔았다. 로마인들도 같은 이유로 가짜 그리스 미술품을 공산품마냥 찍어냈다. 문서를 위조하거나 시대가 다른 건축양식을 병치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르네상스는 미술사는 물론 위조사에서도 분수령이었다. 걸출한 예술가들의 활발한 활동에 발맞춰 위조꾼들 역시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회화와 판화가 예술작품으로 분류되면서 위조 시장의 활성화를 이끌었고, 돈 없는 화가나 복원 전문가가 가담하면서 정교함이 배가되었다. 전문 위조 감정가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위작의 생산, 유통, 판매는 시민세력이 성장하고, 미술품 수집 열풍이 대중에까지 확산된 빅토리아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1
돈과 욕망이라는 뻔한 이유
그렇다면 위작은 왜 만들어지는가. 돈과 욕망이라는, 뻔한 이유 때문이다. 간혹 신앙을 위해,2 전문가들의 멍청함과 교만을 폭로하기 위해 위작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그야말로 ‘간혹’이다. 대개는 남들과 다른 ‘취향’과 ‘부’를 자랑하고픈 사람들(특히 부자들)의 욕망, 그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진작의 수가 위작을 만들어낸다. 위작에 작용하는 논리는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이다. 그러니 미술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오늘날 위작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 고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인기작가일수록 위작이 많은 것도 마찬가지다.
미술품에 시장논리가 적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1990년대부터다. 주식시장 거품이 꺼지자 돈 있는 자들은 차세대 투자처로 미술품을 지목했다. 안정적으로 매매차익을 얻을 수 있을뿐더러, ‘특별한 계층’으로 자신을 차별화하고 지적·예술적 취향을 과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크리스티와 함께 경매시장을 양분하는 소더비가 부동산 개발회사 타우프만에 매각되면서 미술시장에 자유시장주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러시아와 중국의 신흥 부자들은 물론 헤지펀드까지 이 새로운 투자처로 흘러들었다. 미술가는 돈 되는 상품을 제작하는 장사꾼이 되어 경매장, 갤러리, 유통 거물과의 커넥션으로 가격을 끌어올렸다.3 위작이 판칠 최적의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안목 감정 vs 과학 감정
이에 발맞춰 위작 감정 기술도 발전했다. 전문가 판독은 기본이고 과학적 분석, 도록 및 갤러리의 유통증명서 확인 등의 방법이 더해졌다. 과학적 분석은 적외선 검사, 엑스선 검사, 탄소 측정, 재료 측정을 통해 덧칠된 부분, 스케치 부분을 찾아내고 종이와 물감의 연대 등을 알아내는 방식이다. 논박이 불가능한 정확성을 담보한다는 게 최대 장점이지만, 감정 기술이 발전한 만큼 위조 기술도 진보해서, 과학적 분석쯤 보란 듯이 통과하는 위작이 속속 나타난다는 게 함정이다.
이런 경우 해당 작품이 실린 도록이 도움이 된다. 제작 연도나 작가의 사인이 도록에 기록된 것과 다르다면, 위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문제는 모든 작품이 도록에 실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해당 작품이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가를 기록한 유통증명서를 살펴야 한다. 물론 작가가 생존한 경우 직접 물어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참고용이다. 위조의 역사를 보면 화가 본인이 유명해지기 전에 그린 작품을 최근에 그린 것처럼 서명과 날짜를 고치거나, 지인이 소장한 작품이 위작인 줄 알면서도 돈을 벌게 해줄 요량으로 사인해준 일이 비일비재하다. 반대로, 처음에는 위작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번복한 사례도 적지 않다.
결국 위작은 전문가들의 ‘안목’으로 판가름 난다. 오랫동안 진작을 봐온 노련한 전문가들은 위작을 보는 순간 위화감을 느낀다. 때로는 배가 아프다든지, 머리가 어지럽다든지 하는 신체적 증상을 동반하기도 한다. 위작을 감정하는 것은 이 걸쩍지근한 첫인상을 예술적 지식과 경험, 인문학적 소양으로 증명하는 과정이다. 그 길의 끝에서 위화감의 정체가, 이를테면 바로크 시대 작품에 새겨진 로마네스크 양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과학적 분석은 전문가의 안목 감정을 뒷받침하는 보조수단일 뿐이다.
지난 10년간 한국 미술시장도 세계의 흐름과 함께 했다. 미술품은 재테크 수단이 되었고, 투자수익률은 연평균 7퍼센트를 웃돌았다. 이와 함께 내로라하는 작가의 위작이 횡행하면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2005년 서울옥션에 출품된 이중섭의 드로잉 여덟 점 중 <물고기와 아이> 등 네 점에 위작 시비가 붙었다. 이어 김용수 한국고서연구회 고문이 갖고 있던 이중섭, 박수근의 작품 2,843점을 공개하며 시비에 불을 댕겼다. 혼란은 서울옥션 대표가 사임하고, 김고문이 구속되고, 그가 소장한 작품 전체가 위작 판정을 받으면서 간신히 수습되었다.4
2006년에는 서울옥션이 경매에 붙인 변시지의 <제주풍경>이 위작 스캔들에 휘말렸을 뿐더러, 이듬해 이중섭, 박수근, 변시지의 작품을 대량으로 위조한 일당이 붙잡혀 파문이 일었다. 2007년 서울옥션에 나와 한국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낙찰가(45억 2,000만 원)를 기록한 박수근의 <빨래터>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연이은 시비에 미술시장은 얼어붙었고, 사건은 재판으로까지 비화되어 2009년 “진작으로 추정된다”는 판결을 받고서야 진정되었다.
한동안 잠잠하나 했던 위작 논란은 2015년 10월,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가 서울의 유명 화랑이 이우환의 위작을 유통시켰다는 첩보를 받아 압수수색을 벌이며 재점화되었다. 위조범들이 자백은 물론 직접 위작을 만드는 시범을 보였고, 작품을 감정한 최명윤 국제미술과학연구소장도 “경찰에게 의뢰받은 13점에 대해 과학감정과 안목감정을 실시한 결과 모두 위작으로 판단”했으나, 정작 이우환 화가가 “모두 진작”이라고 맞서면서 사건은 장기화되었다. 2016년 7월 현재 이화가는 변호사를 선임해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다.
한편 연이은 위작 스캔들에 업계종사자들은, 이참에 주먹구구식 미술품 거래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구체적 방안으로는 미술품 및 문화재 유통법 제정, 작가별 전문 갤러리 시스템 및 전문 중개사 제도 도입 등을 예시했다.
2013년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감평원)이 펴낸 『한국 근현대미술 감정 10년(2003~2012)』을 보면, 감평원이 감정한 5,130점 중 위작의 비율은 27퍼센트다. 위작 판정률이 높은 상위 3인은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순이고, 이중 이중섭의 위작 판정률은 58퍼센트에 달한다.
참고
1. 토머스 호빙 저, 이정연 역, 『짝퉁 미술사』, 이마고, 2010.
2. ‘튜린의 수의Shroud of Turin’가 그 예다. 프랑스 어느 집안에 대대로 아마포 한 폭이 가보로 내려왔다. 아마포는 오랫동안 지역에서 신성한 물건으로 숭배되다가, 1578년 이탈리아 튜린(토리노)의 성당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898년, 한 아마추어 사진가가 아마포를 한번 찍어봤더니, 놀랍게도 네거티브 필름에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의 형상이 드러났다. 아마포는 그냥 천이 아니라 예수의 시신을 감싼 수의였던 것이다! 튜린의 수의는 곧장 유명해졌고, 가톨릭교도들의 성유물이자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100여 년간 이어진 진위논란은 1980년대에야 끝났다. 탄소-14 테스트 결과 수의에 나타난 이미지는 14세기에 물감으로 그린 가짜로 판명되었다.
3.도널드 톰슨 저, 김민주·송희령 역, 『은밀한 갤러리』, 리더스북, 2010.
4.왕진오, ‘[SS초점] 논란만 있고 결말 없는 미술품 ‘위작’ 흑역사 5’, 스포츠서울, 2016.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