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와있으나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이슈들
한국에서 개헌은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을 공포한 후 총 아홉 번 있었다. 그중에서 여섯 번이 집권자의 독재나 장기집권을 위해 행해졌다. 한국의 헌정사는 헌법 유린의 역사였다.
첫 번째 개헌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있었다. 정부 측 안과 국회 측 안을 적절히 섞었다 해서 ‘발췌개헌’으로 불리는 1차 개헌의 핵심은, 4년/중임/간선제인 대통령제를 5년/단임/직선제로 바꾸고, 국회를 미국처럼 상원과 하원이 있는 양원제로 재편하는 것이다. 이전 총선에서 비호세력들이 대거 낙선함에 따라 간선제로는 연임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에 온갖 압력을 가하는 한편, 직선제를 받아주면 양원제를 도입해 국회와 권력을 나누겠다고 설득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1952년 7월 7일 군경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립투표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그해 8월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하지만, 양원제는 시행하지 않았다.
2차 개헌도 이승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어렵사리 재임에 성공한 이승만은, 기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더 해보자는 심산으로 헌법개정을 서둘렀다. 지난번 대통령제를 5년/단임으로 바꾼 법 조항 옆에, ‘단 초대 대통령은 제외’라는 문구를 넣으려 한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의석은 국회 전체 203석의 3분의 2인 136석. 하지만 투표 결과 찬성표는 135표에 그쳐 이대로 개헌안이 부결되나 싶었으나…… 이튿날 정부가 기상천외한 묘안을 찾아냈다.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인데 사람은 0.333…일 수 없고, 이런 경우 5 미만의 수는 버리는 게 관례이니 개헌정족수는 136표가 아니라 사사오입四捨五入한 135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1954년 11월 29일,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된다.
창의적인 발상으로 3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내처 4선까지 넘봤다. 그러나 이승만과 자유당의 장기독재에 대한 불만이 사회에 팽배한 상태. 적법한 방식으로 권력을 연장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이승만은 선거일을 여당에 유리한 3월 15일로 앞당기고, 야권 인사들을 탄압하고, 유령 투표용지를 투입하고, 군경을 동원해 유권자를 협박하고, 개표를 조작하는 등 웬만한 선거 부정은 다 저질렀다. 그 결과 1960년 85퍼센트 지지율로 4선에 성공하지만, ‘4·19혁명’이라는 역풍을 맞으면서 대통령직을 내놓게 된다.
이어 소집된 국회는 이승만 같은 독재자가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도록 헌법을 손질했다. 대통령제는 양원제에 입각한 의원내각제로 바뀌었다. 또한 시민의 기본권 침해 금지, 헌법재판소 설치, 대법원장 및 대법관선거제, 선관위의 헌법적 지위 강화, 공무원 및 경찰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제도화, 언론검열 금지 등 통해 몇몇 유력인사가 초법적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승만 잔당들은 처벌하지 못했다.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음에도 재판에서 무죄나 가벼운 형을 선고받고 나와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이들을 벌줘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급기야 학생시위대가 국회까지 점거했지만, 현행법상 마땅한 처벌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1960년 11월 29일 국회가 4차 개헌안을 의결하고 3·15선거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자, 이승만 시절 공직에 있으면서 지위를 이용해 반민주적 행위를 하거나 재산을 모은 자들을 처벌하려 하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소장의 군사쿠데타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권력을 무력 탈취한 박정희는 가장 먼저 헌법을 고쳐 썼다. 의원내각제는 4년/중임/직선의 대통령제로 되돌아갔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4년 후 연임에도 성공했다. 그리고 재임 중이던 1969년 다시금 헌법을 손보았다. 목적은 단 하나, 대통령 3선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었다.
1971년 세 번째로 대통령직에 오른 박정희는 이듬해 10월 17일 긴급조치를 발동해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헌법을 또 한 번 개정했다. 일본 메이지유신을 모방했다 하여 ‘유신헌법’으로 불리는 7차 개헌의 골자는, 입법·사법·행정의 권한을 전부 틀어쥔 대통령의 종신집권, 사실상의 1인 독재였다.
독재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장 김재규가 대통령을 암살하며 끝났다. 긴 겨울 뒤 찾아온 ‘서울의 봄.’ 그러나 12월 12일 전두환 육군소장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국회를 장악하고, 1980년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을 확대한 데 이어,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면서 ‘서울의 봄’은 찰나로 스러졌다.
전두환 신군부는 전임자들처럼 개헌부터 서둘렀다. 유신헌법의 독소조항은 거의 폐기되고, 시민의 기본권에 관한 조항들이 줄줄이 기록되었다(대통령제는 7년/단임/간선제로 바뀌었다). 일견 민주적이고 현대적인듯하지만, 문제는 국가의 법의지였다. 신군부 시절 법과 제도는 유명무실하여, 시민과 반대세력에 대한 인권침해, 고문, 납치, 살해가 매일처럼 벌어졌다.
정부가 앞장서 민주주의를 훼손하자 반정부 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의 당장 요구는 직선제로의 개헌. 현행법대로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으면 군사정권이 온갖 꼼수를 동원해 정권을 이양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신군부는 1987년 4월 13일 “올림픽이 코앞이라 개헌 논의는 다음 정권으로 미룬다”는 요지의 ‘4·13 호헌 선언’으로 응수하는데, 이것이 결국 자충수가 되었다.
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했다. 6월 9일 반정부 시위에 나섰던 대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그런데도 6월 10일 정부 여당이 군사정변의 주동자 노태우를 대선후보로 지명하자, 반정부 시위의 주축이던 학생, 야당, 성직자, 공장노동자들은 물론 대학교수와 회사원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왔다. 스무날 밤낮 지속된 거대한 시민 저항에 정부는 6월 29일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다”며 백기투항했다.
이렇게 돌입한 아홉 번째 개헌. 1987년 10월 29일 공포된 새 헌법은 일단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사실을 명시했다. 대통령제는 5년/단임/직선제로 바뀌었고, 국회해산권 폐지, 대법관제 및 헌법재판소 부활 등을 통해 삼권분립을 다졌다. 지난날을 반면교사로 삼아 군의 정치중립을 의무화했으며, 언론검열 폐지,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보장, 최저임금제 시행, 노동자 단체행동권 보장, 사회적 약자 권익 보호, 체포 및 구속 시 가족 통지의무 명시 등등 시민의 기본권을 적시했다. 이것이 현행 헌법, 이른바 ‘87년 헌법’이다.
물론 지난 30여 년 간 개헌 논의는 끊이지 않았다. 대선을 앞두고, 혹은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 즈음 개헌은 늘 정치권의 중요한 이슈로 오르내렸다. 하지만 그 목적이 ‘정권 연장’ ‘권력 이양’ 같은 정치적 이해에 따른 것이었기에, 역시 정치적 이해에 따라 거부돼왔다.
탄핵 이후 정치권의 최대 화두 역시 개헌이다. 권력구조만 바꾸자는 ‘원포인트 개헌’, 시대에 맞춰 다 바꾸자는 ‘포괄적 개헌’, 일단 권력구조만 손대고 나머지는 천천히 바꾸자는 ‘순차적 개헌’ 등 안도 다채롭다. 개헌의 범위, 방법 등은 다르지만 ‘87년 헌법’이 산적한 현안들을 해결하기에 여러 모로 미흡하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대통령에 너무 많은 권한이 집중돼 있어 국정운영이 어렵다는 것도 공통된 문제의식이다.1
이에 대해 정치권, 법조계, 시민단체가 찬반양론으로 분분한데, (정치권을 제외하고) 어느 쪽이나 기본 입장은 같다. 개헌은 시민의 기본권을 확정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정치공학에 좌우되는 일이 아니며, 논의의 주체도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반대파들은 작금의 문제들을 해소할 길이 법이 아니라 ‘법의지’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개헌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제’를 제어하겠다고 말하기 전에, 현행 헌법과 법률로도 충분히 폭주하는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데 왜 못하는지 돌아보길 권한다”는 이야기도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2
아무튼 현행법상 개헌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 또는 대통령이 개헌안 발의
2. 시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20일 이상 헌법 개정안 공고
3. 국회 의결: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4. 의결 후 30일 이내 시민투표: 만 19세 이상 선거권자 과반수 투표, 투표자 과반수 찬성
5. 확정된 개정안 대통령 공포
참고
1. 안수찬, “헌법이여, ‘국가의 의무’를 담아라”, 《한겨레21》 제779호, 2009.9.24. “한국 헌법의 1조는 주권 지향적이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반면 선진 헌법의 1조는 인권 지향적이다(‘스위스 연방은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나라의 안전과 독립을 수호한다’). 헌법이 권력체제의 문제인지, 권리장전의 선언인지에 대한 결정적 차별이 여기서 시작된다. 한국 사람들은 정치권력을 고민할 때만 헌법을 들춰본다. 선진국에선 인권이 침해당할 때 헌법을 들여다볼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헌법을 만만하게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2. 박찬수, ‘개헌은 없다’, 한겨레, 2016.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