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대의 폰지 사기_지금, 여기 와 있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이슈들
영화 <마스터>는 실존인물 조희팔을 모델로 해 화제가 됐습니다. '건국이래 최대 게이트'라고 불렸던 조희팔의 사기행각은 그 피해액만 4조에 달하는데다 피해자는 3만 명이 넘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죽음을 두고도 의혹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뉴스의 배경>은 조희팔 사건의 전모와 그의 사기행각을 되짚어 봤습니다. 아울러 조희팔의 사기 유형인 '폰지사기'의 유래도 함께 소개합니다.
조희팔은 1957년 경북 영천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가난에 시달리다가 “성공해서 가족도 돌보고 돼지고기도 실컷 먹고 텔레비전도 편히 보겠다”며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혈혈단신 대구로 올라왔다.1 10대 대부분을 막노동판과 영세공장을 전전하며 보냈고, 20대에는 도박판 허드렛일을 하며 영남권 최대 폭력조직 ‘동성로파’ 행동대원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그러다 형이 일하던 한국 최초의 다단계회사 SMK(숭민코리아)에 입사, 업계 노하우를 익혔다.
2004년 SMK에서 하산한 조희팔은, 그해 10월 지인 10여 명의 도움으로 다단계회사 ㈜BMC(Big Mountain Company)를 차렸다. 종목은 의료기기, 설계한 수익률은 연 35퍼센트. 투자자가 의료기기 한 대 값에 해당하는 440만 원을 투자하면, 이자까지 총 594만 원을 1년 동안 나눠서 입금해주는 구조였다.
은행금리 몇 배에 해당하는 수익률에 솔깃한 투자자들이 찾아왔고, 늘 그렇듯 처음 얼마간은 약속한 돈이 따박따박 지급되었다.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자, 조희팔은 ㈜첼린, ㈜씨엔, ㈜리브, ㈜아더스 등 회사 수십 개를 여러 지역에 세운 다음, 마치 서로 다른 회사인양 움직이며 단속과 의심을 피했다.
그러나 사기행각은 곧 한계에 다다랐다.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이자나 배당금을 지급하는 방식의 폰지사기는, 신규 투자자 유입이 줄어드는 순간이 임계점이다. 배당금 입금이 조금씩 늦어지자 회원들이 하나둘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내기 시작했다. 결국 2008년 10월 경찰이 압수수색에 나섰고, 조희팔은 회사 전산망을 파괴한 뒤 준비해 놓은 돈을 가지고 도주했다. 11월에 수배가 떨어졌지만 요리조리 피해 다니다가, 도피자금으로 꿍쳐둔 165억 원을 현금화해 12월 9일 충남 태안군 마검포항에서 중국으로 밀항했다.
피해액 4조, 피해자 3만 명
이후 밝혀진 사기 내용은 어마어마했다. 피해액 약 4조 원, 피해자 전국 3만여 명. 대부분이 서민이고, 다단계 사기의 특성상 가족이나 지인관계로 얽혀 있었다. 부산에서만 1조 원이 증발한 사건의 후폭풍으로 개인파산, 이혼, 별거, 자살이 연이었다.
동시에 이 정도 규모의 피라미드 조직을 형성 및 유지하고, 도주 자금을 챙겨 밀항하기까지 행정, 경찰, 검찰 공직자들과 유착이 있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실제로 조희팔이 밀항할 당시 해경은 미리 계획을 포착했지만, 조희팔의 신원을 ‘마약사범’으로 오인하면서 작전을 마약 반입 현장을 덮치는 방향으로 잘못 짜는 바람에 도주를 막지 못했다고 밝혔었다. 이에 피해자들은 ‘바른가정경제실천을 위한 시민연대’로 집단대응에 나서는 한편, 40명으로 구성된 사설자경단, 이른바 ‘40인의 추적자’를 발동하여 조희팔의 거취와 은닉자금 추적에 나섰다.
경찰청 지능수사대도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2012년 5월 사망 소식을 발표했다. 조희팔이 2011년 12월 중국 산둥성 한 가라오케에서 나훈아의 ‘홍시’를 부르다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증거로 경찰은 유족이 촬영한 51초짜리 장례식 동영상과 중국 공안이 발행한 사망증명서, 화장인증서, 유골을 내놓았다. 이와 함께 조희팔의 측근들도 더 이상 생존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면서 사실상 추적을 접었다.2 그러나 사람들은 조희팔이 정관계에 너무 깊숙이 연루돼 있어서 경찰이 일부러 잡지 않는 것이다, 연루된 공직자들이 직간접적으로 도주와 은신을 돕고 있다는 음모론적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12년 9월, 대구 성서경찰서 소속 경사가 조희팔을 잡으러 중국에 갔다가 오히려 일당에게 접대를 받고 돌아온 혐의로 구속되었다. 11월에는 조희팔 측근과 유진그룹 등으로부터 내사·수사무마 청탁과 함께 10억 원대 금품을 받은 혐의로 서울고검 김광준 검사가 구속수감 되었다(김 전 검사는 2014년 5월, 징역 7년을 확정했다). 2013년 3월에는 조희팔의 자금 6억 원을 운용 및 은닉한 혐의로 전 대구경찰청 임아무개 경사 등 세 명이 불구속 기소되었고, 2015년 1월에는 조희팔을 비호하며 15억 8,000만 원을 받아 챙긴 대구지검 서부검찰 오아무개 서기관이 체포되었다. 이게 다가 아니다. 10월에는 조희팔에게 9억 원 뇌물을 받은 대구지방경찰청 권아무개 전 총경이 구속기소 되었다. 권총경은 조희팔 사건의 수사책임자였다.
죽어야 사는 남자, 부패의 집약
이즈음 SBS 탐사보도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가 조희팔 사망에 의혹을 제기한 “죽어야 사는 남자-그는 어디에 있나?”를 방영했다. 2012년 경찰이 내놓은 사망 증거자료를 전문가들과 면밀히 분석한 방송은, 관에 누운 조희팔의 얼굴을 집중 촬영한 장례식 동영상에 편집과 조작 흔적이 있다는 점, 사망증명서에 공안의 확인도장이 찍히지 않은 점, 중국에서 화장증명서 위조쯤은 일도 아니라는 점, 조희팔을 봤다는 제보가 끊이지 않는 점 등을 들어 조희팔이 ‘죽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조희팔 사건은 하나의 사기 사건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부정과 부패와 불합리와 모순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것이다. 이 사건을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묻는다면, 대한민국 전체의 수치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3면서 수사 재개를 촉구했다.
방송 다음날, 수년 간 경찰이 생존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던 조희팔의 오른팔 강태영이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사건을 담당한 대구지검이 원점에서부터 재수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으나, 얼마 후 조희팔의 생사를 규명할 핵심 인사로 꼽히던 외조카 유아무개 씨가 숨진 채 발견되면서 초반부터 난항을 겪었다. 12월 19일 강태영의 신병이 한국으로 인도되었지만, 심문 결과 조희팔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기존의 경찰 발표를 재확인하는 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2016년 6월 28일 검찰은 조희팔이 죽은 게 확실하다고 결론내리고,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매조지었다.
같은 유형의 사기 수법은 전부터 있었으나, 찰스 폰지 이래로 이렇게 명칭화되었다.
찰스 폰지는 188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1903년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도박과 낭비를 일삼다 결국 전과자가 되었다. 1919년 보스턴에 정착해서도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이탈리아에서 온 백만장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국제우편 쿠폰사업을 벌인다면서 투자자를 모집했다. 당시 국제우편 시스템은 요금 대신 쿠폰을 지불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쿠폰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 환율이 크게 요동쳤음에도 전쟁 전 환율로 교환되고 있었다. 폰지는 해외에서 국제우편 쿠폰을 대량으로 매입한 다음 미국에 유통시키면 환차익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끼는 역시 수익률이었다. 그는 45일 후에는 원금의 50퍼센트, 90일 후에는 원금의 100퍼센트 이자를 약속했다.
높은 수익률에 솔깃한 투자자들이 찾아왔다. 폰지는 약속대로 이자를 꼬박꼬박 지급했다. 재미를 본 투자자들은 재투자를 하는 한편 가족과 지인을 2차 투자자로 끌어들였다. 소문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 삽시간에 4만여 명이 몰려들었고, 1920년 2월 5,000달러였던 투자총액도 넉 달 만에 4만 5,000달러로 불어났다.
그러나 폰지의 사업은 실체가 없는 다단계 금융사기에 불과했다. 새로운 회원의 유입이 줄면 돈도 따라 줄었고, 배당금 지급 날짜를 지키지 못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에 불안해진 일부 투자자들이 돈을 회수하는 와중에, 보스턴우체국이 폰지가 기획한 국제우편 쿠폰사업을 허용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20년 8월 폰지는 파산 신고를 하고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얼마 후 보석으로 풀려나와 1925년 플로리다로 거처를 옮겼지만, 또다시 같은 수법으로 사기행각을 벌이다 체포돼 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때부터 폰지는 다단계 금융 사기꾼의 원조가, 폰지사기는 다단계 금융사기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적은 돈을 투자해 많은 돈을 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유혹적인 폰지사기는 여전한 유효성을 과시하며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중 2008년 미국에서 일어난 ‘매도프 사건’은 규모나 사기 액수, 파괴력에서 단연 최고다.
미국 나스닥증권거래소 회장을 지낸 버나드 매도프는 1960년 자신의 이름을 딴 증권회사 ‘버나드매도프LLC’를 세운 다음, 사기행각이 탄로 나기까지 폰지사기 수법으로 약 650억 달러, 한화 66조 원 상당을 긁어모았다. 매도프는 2008년 12월 체포돼, 징역 150년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참조
1 김윤호, ‘[이슈취재]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 8년 추적기’, 중앙일보, 2016.4.3.
2 이때 지능수사대를 지휘한 사람이 박관천 경정이다. 조희팔 수사를 마친 이듬해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으로 파격 승진한 박경정은 2015년 1월 청와대의 ‘정윤회 문건’을 외부로 유출한 혐의로 구속된 데 이어, 2007년 룸살롱 업주로부터 수사무마 청탁과 함께 1억 7,000만 원대 금품을 받은 혐의가 추가로 드러나 1심 재판에서 징역 10년이 구형되었다. 심문 당시 박관천 경정은 담당 검사와 수사관에게 “지금 우리나라 권력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최순실이 1위, 정윤회가 2위, 박근혜 대통령이 3위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3 <그것이 알고싶다> 중 표창원 범죄심리분석 전문가의 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