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와 있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이슈들
*일본이 소녀상 설치에 항의하며 자국대사를 조치했습니다. 미국까지 끌어들여 양국 합의 이행을 촉구합니다. 한국 정부의 밀실협상과 외교력 부재가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그 이면엔 과거사를 지우고 '전쟁 가능 국가'를 원하는 일본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뉴스의 배경>은 자위대를 중심으로 일본 우익의 군국주의적 욕망을 정리했습니다.
20세기 초 소련과 중국이 공산화되고 그 여파가 아시아를 휩쓸었다. 자유주의의 ‘대표’ 미국은 공산주의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일본에 있던 병력을 한국으로 옮기고, 그 공백은 일본이 자체 치안조직을 만들어 메우도록 했다.
1950년 1월 1일 맥아더가 일본의 자위권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2만 5,000명의 해상경비대와 7만 5,000명의 경찰예비대를 발족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소련과 미국의 이데올로기 대리전으로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아시아의 방공전선에 일본을 포함시키기 위해 ‘전범국’ 족쇄를 풀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952년 4월 28일 미국을 주축으로 연합국과 일본은 ‘전쟁을 끝내고 앞으로 평화롭게 지낼 것’을 약속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었다.
'한낱 자경단' 자위대의 가공할 전력
손쉽게 과거를 청산하고 독립국의 지위를 돌려받은 일본은, 미국의 방조 아래 차근차근 전력戰力을 가다듬었다. 1952년 8월 1일 경찰예비대가 보안대로 바뀌었다. 보안대는 1954년 7월 1일 자위대로 개칭하고, 기왕의 육군과 해군에 공군을 더하면서 육해공 전력을 정비했다. 문제는 이것이 평화헌법 제9조 2항을 위배하는지 여부였는데, 일본 정부는 헌법이 보유를 금하고 있는 전력이란 “근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장비와 편성을 갖춘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 정도 능력이 안 되는 무력을 갖는 것, 그 무력을 침략이 아닌 자기방어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위헌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쉽게 말해 자위대는 대단찮게 무장한 자경단일 뿐, 군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아베 정권 이전까지 자위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기도 했다.
‘한낱 자경단’으로서 자위대의 전력은 꾸준히 증가했다. 2013년 현재 육상자위대 약 16만 명, 해상자위대 4만 5,000명, 항공자위대 4만 7,000명 등 총 25만여 명에 달한다. 한국의 60만 병력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지만, 보유한 장비와 무기는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예산 역시 약 6조 3,000억 엔으로 세계 5위를 차지한다.
이와 함께 일본의 군국주의적 욕망도 꾸준히 증가했다. 자위대가 창설된 1950년대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이 워낙 컸기 때문에, 평화헌법은 이견 없이 사회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고 전쟁 후유증을 어느 정도 극복한 1980년대에 이르러, 평화헌법은 외세가 강제한 것이고, 향후 국제관계와 일본의 안보를 위해 집단적 자위권1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며 헌법개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 걸프전에 130억 달러를 지원했는데도, 다국적군이 고마워하기는커녕 ‘수표외교’라고 비아냥거린 후에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2 제아무리 경제대국이라도 군사력이 없으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중국이 미국에 견줄 신흥 강대국로 급부상하고, 북한이 코앞에서 핵실험을 강행하는 모습을 손 놓고 바라봐야 하는 현실도 ‘군사력 없는 국가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듯)했다. 결정적으로 미국이 일본의 무장을 원했다. 냉전시대가 끝나고 자국의 경제상황이 예전 같지 않자, 미국은 일본에 군사적 부담을 덜어달라고 내내 요구해왔다.
군사강국, 활력 없는 현재와 불안한 미래를 위한 돌파구
이 와중에 장기불황에 접어들었다. 30년 간 지속된 불황은 전후사회를 지탱해 온 가치들을 모두 무너트렸다. 활력 없는 현재와 불안한 미래는 사회의 보수화를 부추겼고, 헤게모니를 장악한 우익들은 ‘군사강국’을 새로운 국가전략과 비전으로 제시했다.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갖는 국가=강력한 국가’의 이미지는 군국주의자들을 결집시켰다. 무기를 만들어 팔면 경제를 재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각계각층의 시민들도 열광했다. 그럼에도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 내각서부터 끊이지 않던 개헌 시도는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무산되었다. 자위대를 군대처럼 활용할 수 있는 법률 개정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면돌파가 어려워지자 개헌 세력들은 우회로를 택했다.3 집단적 자위권을 제한하는 헌법을 바꿀 수 없으니, 헌법의 ‘해석’을 바꾼 것이다. 그리하여 2014년 7월 1일 아베 신조 총리는 국무회의를 열고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결정문을 의결했다.
이제껏 일본의 자위권은 ① 일본에 대한 급박하고 부정한 침해가 있을 것 ② 이를 제거하기 위해 다른 적절한 수단이 없을 것 ③ 필요 최소한도의 실력행사에 그칠 것 등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발동될 수 있었다. 헌데 아베 정권은 이중 첫 번째 항목을 “일본 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타국에 대한 무력공격이 발생해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이 근저에서 침해받을 명백한 위험이 있을 경우”로 고쳤다. 공격받는 대상을 일본과 동맹국으로 넓히고, 무력을 쓸 상황도 ‘(권리가) 침해받을 위험이 있을 경우’라고 두루뭉수리하게 표현해, 자의적 판단에 따라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게 한 것이다.4
문제를 일으킨 국가는 응징하겠다?
상기 요건이 충족될 경우, 집단적 자위권을 넘어 유엔의 ‘집단안전보장’에 따른 무력행사에 참가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집단안보는 동맹국이 다른 나라와 싸우면 함께 싸우겠다는 국제적 약속이다. 집단적 자위권이 ‘공격받으면 대응하겠다’는 수세적인 입장이라면, 집단안보는 ‘문제를 일으킨 국가를 응징하겠다’는 적극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자위대 창립 60주년을 기점으로 평화헌법은 완전히 무력화되고, 자위대는 ‘군대’로 거듭났다.
2016년 8월 9일 일왕日王 아키히토가 생전퇴위 의사를 표명했다. 전통적으로 왕위는 사망한 후에야 물러날 수 있는데, 아키히토는 “건강이 좋지 않다”면서 살아생전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마이니치신문은 2016년 7월 10일 중·참의원 선거에서 개헌 찬성 세력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한 것을 계기로 아베 총리가 개헌을 향후 주요 정치 과제로 삼으려 했으나, 이 일로 인해 개헌 논의가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전쟁에 대한 반성과 헌법 준수 등을 중요하게 생각해 온 아키히토 일왕이 아베 총리의 개헌 구상을 저지하기 위해 퇴위 의향을 밝힌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5
참조
1 동맹국이 침략당할 경우 이를 자국에 대한 침략행위로 간주해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유엔 헌장이 규정하고 있는 권리.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대표 사례다.
2 심지어 일본은 1983년 이후 유엔 예산의 10퍼센트를 담당해왔고, 2000년에는 무려 20퍼센트를 넘겼다. 이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액수다.
3 아베 내각은 2012년 이미 한 차례 개헌을 시도했으나, 자민당 등 개헌 찬성 세력이 3분의 2 개헌의석을 채우지 못해 실패한 바 있다.
4 황방열, ‘일본 자위대, 60년만에 ‘전쟁할 수 있는 군대’로 바뀐다’, 오마이뉴스, 2014.7.1.
5 변관열, ‘일왕 ‘생전퇴위’ 숨은 의도는 아베 개헌 저지?’, 한국경제, 201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