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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은 Dec 04. 2024

겨울빛

_ 12월


# 겨울빛
 : 겨울을 느낄 수 있는 경치나 분위기.



12월의 겨울빛은 별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하루 만에 거리의 풍경이 사뭇 다르게 느껴지지요. 별다른 일 없어도 괜스레 설렘을 주던 상점의 장식들은 여전한데 왠지 그 빛은 색을 잃은 듯하고요. 북적이던 축제 후의 텅 빈 허함이 거리 곳곳에 묻어납니다. 또다시 빠르게 지나버린 한 해에 대한 상념들이 겨울바람을 타고 빈 가슴 깊이 파고듭니다. 어떤 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힘을 불어넣어 주는데 크리스마스가 그런 것 같아요. 짙어지는 연말의 헛헛함 속에서 아쉬움과 쓸쓸함에 젖어있지 않게 하려고 선물처럼 크리스마스가 있는 게 아닐까요. 종교는 없어도 누군가를 생각하며 무언가를 준비하거나 좋아하는 영화 한 편 보면서 기적을 꿈꿔 보는 시간은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누릴 수 있는 고마운 하루입니다.


새로운 카페를 찾다가 얼마 전 맛보았던 커피 맛집이 가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별다른 기대 없이 체인점이 주는 기계적인 느낌을 상상하며 갔는데 자그마한 갈빛 카페는 외관부터 마음을 빼앗았고 아늑한 인테리어는 커피맛을 더욱 깊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쉽사리 최애 카페 자리는 내어줄 수 없지만 글쓰기 좋은 음악까지 흘러나오니 두 번째로 좋은 곳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주제의 글을 쓰려고 들어온 카페가 크리스마스를 불러왔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소품으로 겨울빛 단장을 한 카페에 캐럴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요. 창밖은 강풍에 매서운 추위가 몰려오며 첫눈 예보에 대한 기대감을 돋우어 주고 있네요. 한 주의 첫 이틀은 가장 고됩니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같은 상황에서도 퇴근 후 밤이면 녹초가 되어 한참을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게 돼요. 그래서 꼭 하루쯤은 출근 전 잠시 카페에서 좋아하는 커피로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어김없이 이어질 힘겨운 하루를 위해 토닥임으로 시작하는 거지요. 그러면 출근길이 조금은 가벼워집니다.


트리 옆에 앉은 꼬마 숙녀가 머리띠를 매만져 주는 엄마에게 예쁜 미소를 짓습니다. 그 모습을 담는 엄마의 뒷모습과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두 딸들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어요. 이른 새벽 기쁨이나 장군이 중 누군가 먼저 깨면 산타가 왔다고 소리치며 잠들어 있는 아이를 깨워 산타의 선물로 달려갔습니다. 깊은 새벽 강아지 인형 퍼피를 안고 볼을 비비던 기쁨이와 장난감 화장대를 열고 입술을 한껏 내밀며 립스틱을 바르던 장군이의 모습은 지금도 참 좋아하는 사진으로 남아있지요.


크리스마스가 되면 커다란 미션을 비밀리에 수행했던 우리들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어느 해인가는 동화책에서 산타에게 간식과 편지를 놓아두는 걸 보더니 장군이가 산타에게 편지를 쓰는 거예요. 아무리 어려도 글씨체를 분명 꼼꼼하게 비교할 게 분명해 내 평생 친구는 멋진 아이디어를 생각했지만 쉽지는 않았어요. 딸이 남겨둔 작은 공간 안에 담을 워드로 출력한 답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몇 번이고 새로 편지를 수정해야 했으니까요. 그 무렵 아이들이 산타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던 터라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테스트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후 아이들은 거봐, 산타는 진짜 있어! 하는 표정을 지었지요.


산타는 있어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다만 그 믿음이 믿고 싶다로 바뀌어 다시는 그날의 기쁨을 가질 수 없게 되었을 뿐이지요. 내게는 아직도 엄마에게 묻지 않는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밤은 유난히도 잠이 오지 않잖아요. 그날도 빨리 자지 않으면 산타가 지나가 버린다는 엄마의 말에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다가 갑자기 갖고 싶은 선물을 바꾸어 기도했어요. 밤새 하는 대형 마트나 편의점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소원은 이른 아침에 이루어졌고요. 그 기적 같은 순간은 소중하게 간직되어 산타에 대한 믿음으로 자리했습니다. 인생에서 때로는 동화처럼 믿고 싶은 순간들이 하나쯤 있어야 하니까요. 어려운 시절 산타와의 추억을 만들어준 엄마와 아빠에게 고맙습니다. 덕분에 내 딸들에게도 그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었네요.


특별한 것 없는 하루가 되어도 괜찮아요. 반짝이는 것들만 보아도 동동 거리는 마음. 별이 내려앉은 듯한 풍경의 거리를 걸으며 두근거림의 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12월의 겨울빛은 눈부십니다.



(2024.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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