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맑았던 시절
#복숭앗빛
: 복숭아의 빛깔과 같은 연한 분홍빛.
작은 일에도 환하게 웃는 아이들. 시무룩하던 제자의 얼굴이 달콤한 젤리 하나에 해처럼 밝아지고 퀴즈 한 문제에 환호하는 것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까르르 웃는 어떤 아이의 얼굴은 복숭앗빛처럼 고와서 떠난 후에도 잔상이 마음을 맴돌지요.
맑았던 시절을 떠올리면 '너랑나랑별랑'이 생각나요. 단짝 친구와 함께 밤하늘에서 유난히도 빛나는 별을 본 날이었지요. 정말 예쁘다며 서로 자신의 별로 삼겠다고 하다가 이내 우리는 우리만의 별이라 하며 '너랑 나랑 별이랑'이라는 의미의 이름도 붙여주었어요. 그 별을 볼 때마다 서로를 생각하자고도 했고요. 그 후 일기장의 이름도 '별랑'이 되었고 미주알고주알 별랑이에게 보내는 편지로 그날의 일들을 담았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눈이 서울에 내린 해가 있었어요. 친구와 나는 집 앞 골목에 이글루를 만들겠다며 저녁이 되도록 신나게 눈벽돌을 만들어 집을 지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져 둥근 천장까지는 만들지 못했지만 그래도 제법 높은 담을 쌓아 뿌듯했어요. 우리의 아지트는 다음 날 사르르 녹아버렸지만 언젠가 다시 눈이 많이 오면 그때는 꼭 이글루를 완성하자고 약속했습니다. 친구가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진짜 이글루를 만들어냈을까요. 입김을 호호 불며 추운 줄도 모르고 웃어대던 그 겨울밤은 세상없이 행복했네요.
입시를 향한 내달림으로 젊음을 묶어둘 수밖에 없었던 학창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일탈도 떠오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호기롭게 도서관을 나오며 결심한 것에 비해 너무나도 소심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 나로서는 홀로 깊이 간직하고 싶은 자유의 오후였어요.
아마도 그 당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을 거예요. 아무 버스나 타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까지 가다가 마음이 멈추는 곳에서 내리는 것. 나름 무척 많이 가서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훗날 돌이켜 보니 집에서 버스로 30분도 되지 않는 가까운 곳이었지요. 하지만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고3에게는 나름 모험의 길이었답니다.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단발머리 여고생은 버스에서 내린 후 한 초등학교 길 안내판을 보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길에서 한 소녀를 만났고 길을 물어보던 내게 그 아이는 기꺼이 꼬마 안내자가 되어 주었어요. 소녀의 학교에서 우리는 함께 따스한 오후를 나누었습니다. 가수가 되고 싶다던 소녀는 ‘옹달샘’이라는 노래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어요. 우리는 수업이 끝난 후의 한가로운 운동장 스탠드 계단에 앉아 같이 노래도 부르고, 학교 이곳저곳을 돌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요. 내향적이지만 아이들 앞에서 만큼은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되는 나의 이야기로 방글방글 웃는 소녀와 함께 있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저녁으로 물들었습니다.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헤어지며 뒤돌아 가는 걸음이 쉽지 않았던 날. 복숭앗빛 볼의 소녀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 삶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요. 어린 시절 만났던 고등학생 언니를 그 아이도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날 내가 어떤 이유로 흔들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텅 빈 운동장 빛 사이 폴폴 날아다니던 흙먼지와 바람결 가득했던 맑은 웃음소리만이 아련한 색으로 남아 있지요.
소녀와의 시간은 마음이 시릴 때면 한참을 바라보던 하늘과 함께 내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어요. 휴대폰도 없던 시절, 달랑 이름 하나만 주고받으며 헤어져야 했던 그 아이를 잊지 않고 싶어서 그날의 오후를 동화로 남겼습니다. 소녀의 마음과 가족을 상상해 보며 스무 살에 썼던 '하늘바라기'. 오래도록 서랍에 묻혀있던 단편 동화는 강산이 두 번 바뀐 후에야 세상의 빛을 보며 등단의 길을 열어주었네요. 그 후로 3년. 서랍 속 잠들어 있는 인물들에게 빛을 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