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11월
# 가을빛
: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경치나 분위기.
11월은 내딛는 시선마다 시린 마음을 자아냅니다. 가을의 찬란함과 반짝이는 12월 사이에 놓여 더욱 쓸쓸해 보이지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부르던 가을 나무는 조금씩 앙상한 속살을 드러내며 겨울을 준비합니다. 스산한 바람 속 흩날리는 낙엽을 보며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하는 것도 11월이에요. 그래서인지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의 정취가 헛헛하게 느껴집니다.
가을이 아닌 계절에는 가을빛을 닮은 색으로 마음의 위로를 받을 만큼 가을을 좋아합니다. 여름의 끝자락이면 바람이 싣고 오는 가을 내음에 첫눈을 보는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뜁니다. 싱그러운 시작의 봄보다 무르익는 살아감의 가을 분위기를 좋아해서 가을이 되면 창밖만 바라보아도 힘이 나지요. 그래서 더욱 11월이 삭막하게 느껴졌나 봐요. 스러지는 가을이 벌써부터 그리워졌으니까요.
11월을 매력 없는 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메마른 11월이 애틋해졌어요. 크리스마스의 설렘으로 달뜨는 계절 앞에서 얼마 남지 않은 11월의 날들이 애처로웠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11월은 주목받지 못하지만 묵묵히 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닮았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 어려운 걸음 하나하나 잠연히 이어가는 마음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갈수록 짧아지는 계절이 못내 아쉬웠는데 올해는 11월에도 가을빛에 취할 수 있었습니다. 높은 기온에 염려했던 단풍빛은 여전히 고왔고 늦게 찾아왔기에 더 깊이 가을에 빠질 수 있었어요. 덕분에 팍팍한 살아감이 견딜 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은행나무 길 한 번 걷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일상의 풍경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멀리 떠나지는 못해도 도시의 마지막 늦가을을 담으며 인사하고 싶었습니다. 경의선 숲길의 작은 철길이나 가을 고궁도 떠올랐는데 올해는 길상사를 시작으로 북촌과 삼청동의 거리를 거닐었습니다. 가을의 길상사를 담은 브런치 글벗 작가님의 글 덕분이지요. 아직 가을이 머물러 있는 길상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즈넉해서 좋았어요. 진영각에서 마주한 법정 스님의 낡은 승복과 빈 의자 앞에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이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가게 되어 미술관 관람은 미루어야 했지만 홀연 떠났기에, 곁에 소중한 사람이 있기에 모든 순간이 빛났습니다. 다가오는 긴 겨울을 무탈하게 지나기 위해 가을빛을 가득 충전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