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인생이 아름답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할 것 같아요.
그러나 그림이 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80년 동안 한 길을 걸었던 미셸 들라크루아의 담담한 말에 위로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들에게서 느꼈던 감동과는 또 다른 깊이의 뭉클함을 안기는 말. 꿈꾸는 사람의 눈빛은 특별하다.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93세의 화가도 반짝이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미셸은 인터뷰와 책 속에서 꿈을 그리는 삶을 살아가라며 내 마음을 도닥여주는 듯했다.
나는 오랫동안 파리를 꿈꾸는 사람이다. 문학 작품 속에서 마주하던 파리는 그 속에 담긴 희로애락에도 불구하고 낭만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문인들이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카페와 책방은 깨고 싶지 않은 꿈같아서,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의 여정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낭만과 예술의 1920년대를 동경하던 길은 자정마다 그 시대로 가서 동경하던 작가들과 만나는 마법 같은 일을 경험한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현시대의 사람들은 지난 시대를 그리워하지만, 막상 그 시대로 가면 그들 또한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마주하게 된다.
<미드 나잇 인 파리>가 파리에 대한 낭만을 영화로 그려주었다면, 미셸 들라크루아는 보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림을 주는 그림을 통해 프랑스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절, 19세기말 ~ 제1차 세계대전 전)'의 모습을 그려낸다. 전시회를 가기 전 『영원히 화가』라는 책을 읽었는데 전시회 그림을 담은 도록처럼 구성된 책이어서 그에 대한 깊은 이야기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그림이 주는 순수한 낭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수줍음이 많고 몽상에 늘 잠겨있던,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이였던 미셸의
인생은 그림을 만난 순간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나의 열 살이었다."
그 시절 어린 미셀이 파리를 놀이하듯 배회하며 온 마음으로 담았던 풍경은 먼 훗날 아름다운 그림으로 탄생한다. 결핍을 자신만의 꿈을 통해 예술로 승화시킨 그의 여정은 그림 한 장 한 장에서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색채와 그리움으로 빚어진 동화 같은 세상 속에 숨어 있는 어린 시절 미셸의 반려견과 그의 모습을 찾는 재미 또한 솔솔 하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인지, 얼마나 파리를 사랑하는지 느껴진다.
많은 이들에게서 실제로 파리에 간 후 기대와는 다른 모습에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괘념치 않는다. 같은 세상에서도 모두가 다른 풍경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꿈꾸던 모습과는 다른 세상을 마주할 수도 있겠지만 그조차도 내게는 행복으로 다가올 것 같다. 각각의 의미가 나만의 시선과 만나면 새로운 빛으로 반짝이지 않을까.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몽상가적 기질이 있음을 깨닫게 된 나는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는 스스로가 마음에 든다. 동경하는 마음은 고된 삶도 따스하게 만들어주니까.
미셸 들라크루아는 자신이 '과거의 파리를 사진처럼 재현하는 것이 아닌, 파리의 인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한다. '과거를 시적으로 그림'이란 표현이 스스로에게 적합하다는 그의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또한 '자신을 누가 무엇이라 부르는지에도 관심이 없다'는 그의 소신이 그림을 보는 내내 아름답게 전해졌다. 그래서 그토록 자유롭게 사랑하는 도시의 풍경을 담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평소 동경했던 파리의 모습이 그의 작품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가슴이 벅찼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그의 그림을 네 악장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었는데, 1악장 <알레그로_소년에서 중년으로>, 2악장 <모데라토_ 파리, 나의 삶, 나의 사랑>, 3악장 <안단테_여름날의 추억>, 4악장 <아다지오_영원을 향해>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희귀 초기 판화와 미공개 최신작 등 60여 작품들도 볼 수 있었다. 밝고 따스한 색채가 어느 순간 급격히 어두워지는 그림들도 만날 수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한 사람의 진솔한 삶이 느껴져 아릿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마지막 악장에서는 지금과 달리 눈이 많이 내렸던 그 시절의 파리가 담겨 있어 무척 인상적이었다. 눈 내리는 파리의 크리스마스라니.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아쉬움을 마음으로 가득 담았다.
전시회를 나가기 전 마지막 작은 공간에서는 진한 감동을 선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첫 전시회를 비롯해 한국에서 많은 팬을 지닌 그는 고령의 나이 때문에 오지 못했지만 대신 깊은 마음을 보냈던 것이다. 천국에 간다면 가져가고 싶다는 '작업 앞치마'.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그림 친구'를 보며 수없이 붓질을 해나가던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울컥해졌다. 빈 캔버스에 밑그림 없이 채색을 하며 앞으로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자신도 모른다던 화가의 작업 과정도 떠올랐다. "다시 태어나도 화가로 살 것이며, 다만 지금보다 더 나은 화가가 되고 싶다."던 그의 말과 함께.
* 첫 그림 _ '단지 우리 둘뿐' (2004)
* 인용글 출처 _ 『영원히 화가』, 미셸 들라크루아, 좋은생각
* 그림 출처 _ <미셸 들라크루아 특별전_ 영원히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