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대체로 아프고 때로는 치명적인 파도를 밀고와 하릴없이 무너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안갯속을 휘청거리면서도 힘겨운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지난주에는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다양한 영화를 즐기지만 그중에서도 여백이 있는 영화에 마음이 기운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다양한 해석을 자아낼 수 있는 고요한 영화. 최근 들어 그러한 영화를 보려면 상영관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다른 동네까지 제법 긴 시간을 내어야 하지만, 그러한 수고가 그 영화에 대한 소중함을 배가시킨다.
영화 예고편만을 보고 <센티멘탈 밸류>는 딸들과 <햄넷>은 남편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영화 모두 혼자 보아도 좋을 것 같았는데 다정하게도 나의 제안에 흔쾌히 나서는 소중한 이들 덕분에 삶이 반짝였다. 처음으로 본 <센티멘탈 밸류>는 브런치 글벗 작가님 덕분에 알게 되었다. 닮은 취향을 지녔기에 믿고 본 영화는 역시나 집을 배경으로 시작하여 스틸컷처럼 흐르는 시작부터 깊이 몰입하게 되었고, 노라와 아그네스가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넌 왜 망가지지 않았어?"
"... 난 언니가 있었거든."
두 어린아이가 버텨내야 했을 삶의 아픔과 고통의 무게. 작고 연약한 언니는 더 조그맣고 가냘픈 동생에게 작은 집이 되어 그녀를 살아내게 했다. 하지만 언니에게는 그러한 '단 한 사람'이 없었고 끝내 스스로 무너지는 집이 되었다. 문득 어린 시절은 부서뜨리고 싶어도 깨뜨릴 수 없는 말갛고 단단한 유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어쩌면 시간은 어린아이를 어떻게든 자라게 하므로, 우리는 각기 다른 균열을 지닌 유리를 마음에 품은 채 어른으로 살아내야 한다.
트라우마로 상처받고 자신과 닮은 딸을 떠나야 했던 아버지는 딸을 위해 쓴 각본으로 그녀와의 간극 속을 뛰어든다. 그 홀은 너무나 깊기에 쉽사리 좁혀지지 않지만, 어린 시절 자신도 모르게 동생에게 집이 되어 주었던 노라는 아그네스 덕분에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이제 동생이 언니에게 작은 집이 되어준 것이 아닐까. 가족의 역사 속에서 대물림되던 트라우마는 끝내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어루만짐을 받는다.
<햄넷>은 셰익스피어의 사랑과 가족 이야기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끌렸는데 영화를 보며 그의 아내 아녜스에게 더 몰입하게 되었다. 그녀의 탁월한 연기 덕분이기도 하지만 자식을 향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이 깊은 울림을 주었다. 아들을 잃은 아내와 남편은 서로 다른 애도의 시간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아내는 '햄릿'을 통해 아들을 애도한 남편의 마음을 느끼게 되고, 많은 관객들의 진심 어린 애도 속에서 비로소 심장 같은 아들을 놓아준다. 이 역시 끝내 문학과 예술이 상실의 고통을 승화시킨 것이다.
의도치 않았는데 서로 닿아있는 두 작품으로 봄의 시작을 열었다. 개인적으로는 <센티멘탈 밸류>의 여백이 더 큰 감동으로 남았지만 두 영화는 모두 힘겨운 생을 어루만져주었다. 글을 쓰고 싶은 나의 마음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어느새 모두 떠난 봄밤. 작은 골목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는 사람만이 덩그라니 남아있었다. 그렇게 정독 도서관에서 풍문 여고 골목을 지나 인사동과 종로를 걷다 종각에서 잠시 멈추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30년 전 그 거리를 즐겨 걷던 우리가 떠올랐다. 어느새 희끗한 머리와 중년의 몸을 지닌 우리는 그 시절 우리를 닮은 청춘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힘들 때마다 시소를 타듯 번갈아 조금 덜 힘든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어루만지며, 또 그렇게 반짝이던 순간을 글로 쓰면서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