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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동하는 영화인 Oct 18. 2023

모든 할 일은 월드컵 이후로 미루자구요

우리에게 허락되는 건 오직 연습뿐


모두의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느낀 계기는 또 있었는데, 바로 체력이었다.

초반에는 5분만 뛰어도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당장 기절할 것 같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극장에서 롱런할 때라, ‘다시는 대만이를 무시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침대 축구? 그게 뭐죠. 20분 이상 뛰는 선수들은 앞으로 다 존경하기로 했다.


유포 경기 중에는 교체 선수 제한이 없다. 원한다면 30초만 뛰고 교체를 해도 된다. 그래서 유포를 배우던 초반에는 체력이 조금만 딸린다 싶으면 바로바로 교체를 외치고 gg 쳤다. 10분은 된 것 같은데 아직 5분 경기 중 2분이 남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좌절감이란...

그런데 절대 늘 것 같지 않았던 체력이 늘었다는 것을 느낀 건, 경기 10분을 뛰어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던 순간이었다. 아, 5분도 못 뛰던 사람들이 10분을 교체 없이 뛰다니, 눈물겨운 발전이었다. 


체력을 늘리기 위해 별도의 훈련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변호를 하자면 우리는 모두 직장인이었고, 동호회에 나오는 시간 외에는 개별 연습을 할 수 있는 자투리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체력이 늘어난 데에는 모두가 꾸준히 연습을 했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동호회의 스케줄을 매주 짠 유포코리아 강사님들의 전략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동호회 모임의 마지막 순서로 진행하던 경기의 시간을 5분 -> 10분 -> 15분으로 점진적으로 늘렸고, 15분 경기로 몇 주간 쭉 연습을 하다가 선수들 컨디션이 어느 정도 올라왔다 싶을 때 10분으로 줄였다. 15분으로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10분짜리 경기를 뛰니 훨씬 더 가뿐해졌고, 여유 체력이 많이 남아 더 뛸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붙었다. 여전히 15분 경기는 빡세게 느껴졌지만, 더 이상은 내가 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간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월드컵이 없을 때는 유포 연습 중에 너무 덥거나 힘들면 쉬었고, 재미있는 주제가 나오면 동료들끼리 수다를 떠는 시간도 많았다. 그런데 월드컵이란 목표가 생기고 나니 모두가 한마음으로 연습에 집중했다. 각자의 실력도 눈에 띄게 늘어서 매주 컨디션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노력의 결과가 눈으로 보이니 이제는 다른 모든 일들은 뒤로 제쳐두고 오직 연습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일단은 다음 달 유포 월드컵까지만 이 최상의 컨디션을 잘 유지하자는 바람이었다.




야외 연습

4월과 5월 내내 팀코리아끼리 전략을 짜고, 경기도 두 팀끼리 붙었다. 농구 또는 축구 동호회와 같은 인기 종목과는 달리, 유포라는 스포츠를 하는 곳은 딱 이 동호회 한 군데뿐이라 별도의 친선경기 같은 것을 할 수 없었다. 같은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면 단순한 친목 다짐뿐만 아니라,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팀과의 경기는 다양한 전략에 대응하는 경험치를 쌓게 해 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실전 연습이 부족했다. 매번 같은 사람들과 연습을 했기 때문에 모든 선수 개개인의 습관, 공격 방식, 단점 등을 파악해 버렸고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경기를 뛰게 되었다. 팀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다른 환경에서의 실전 연습에 돌입하기로 했다. 바로 야외 연습이었다.


유포 월드컵은 네덜란드의 한 야외 하키 경기장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작년에 다녀와본 유포코리아 직원의 말로는 오전 11시부터 뜨거운 땡볕이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야외이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변수도 많았다고 한다. 우리는 야외에서 링 던지기 연습 정도까지는 해봤기에 바람의 방향만 잘 신경 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속 좋은 생각만 하고 있었고 다음부터는 야외에서 경기를 해보기로 했다.


때는 5월이었고 유포 월드컵까지는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은 상태였다. 야외 연습장이 많지 않고 예약이 쉽지 않은 탓에 겨우겨우 서울숲에 있는 야외 운동장을 대여해 연습을 해볼 수 있었다.


큰일 났다.

바람의 방향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바람이 변덕스럽게 다양한 방향에서 불어올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몸이 고장나버렸다. 링을 아무리 세게 던져도 바람의 역방향이라면 3m를 채 못 갔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툭 던져봐도 바람을 타버리면 저 멀리 훌쩍 날아가버렸다. 올 듯 말 듯 하다가 갑자기 급 하강하는 링을 보면서 그동안 실내체육관에서 너무 편안한 조건아래 연습을 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더군다나 햇살은 어찌나 따가운지 링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 때 링 뒤에 거대한 후광이 비쳐서 링을 눈 뜨고 볼 수 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더웠다. 지금은 5월 초였지만, 월드컵은 지금보다 훨씬 더운 6월 중순에 열릴 예정이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벌써부터 아찔한 예감이 들었지만 아직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 다양한 환경에서 경험치를 쌓는 것이 우선이었다. 야외 연습뿐만 아니라, 잔디에서의 연습도 중요했다. 여태까지 실내 체육관에서 연습을 했기 때문에 링을 잡는 우리만의 편한 방식이 있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인조잔디에서 경기를 할 예정이었다. 인조잔디에서 링을 잡아보니 잔디의 쿠션감 때문에 평소에 링을 잡을 때와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사소한 환경 하나가 바뀔 때마다 다시 적응해야 하는 부분들이 생겨서 애를 먹었지만 지금이라도 여러 변화를 경험하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빠르게 적응해 갔다. 

그리고 그동안은 신경 쓰지 못했던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네덜란드 선수들의 평균 신장이 190cm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미리 대비를 할 수 없었기에 겸허하게 맞이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체육관이 생겼어요!

한창 연습을 하던 때였다. 이태원초등학교에서 교내 실내체육관 9개월 장기 대여를 신청받는다는 공고를 냈다. 보통은 공립 초등학교의 경우 1년 단위로 시설 대여가 가능한데, 이번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일정이 지연되면서 남은 기간인 9개월로 지원을 받았다. 여러 팀의 지원이 들어왔고 유포코리아가 최종 후보 3팀 중 한 팀으로 선정되었다. 유포코리아는 최종 선정자를 뽑기 위한 현장에 참석하여 별도의 제비 뽑기로 선정 결과를 받게 될 예정이었다. 운빨 좋은 유포코리아 직원이 참석해서 제비 뽑기를 했고, 티켓팅의 금손답게 당첨이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이틀을 2시간씩 9개월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매주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하나'하고 지도를 찾아보고 이동시간을 계산하던 것에서 드디어 벗어나서 한 곳에서 마음 편하게 유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위치도 서울 한가운데라서 접근성도 좋았고, 시설도 넓고 깨끗하고 좋았다. 체육관 유목민의 삶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이제는 오로지 연습에만 집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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