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비빨=0
국가대표 선발이 있은 후, 모든 것이 시간에 쫓겨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중에서 당연히 유포코리아 직원들이 가장 바빴다. 매주 동호회를 2회 개최함과 동시에, 매달 새로운 유포 꿈나무들을 위한 무료연수도 진행해야 했고 그 와중에 월드컵 준비도 같이 해야겠다. 네덜란드행 비행기값은 날이 갈수록 오르는데, 여권 갱신이 완료되지 않아 여권번호를 기한 내 제출하지 못하는 선수부터 회사에서 출전 허가가 떨어지지 않은 선수까지 일정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결국 비행기표는 180만원을 훌쩍 넘어가버렸지만, 유포코리아에서는 선수들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없는 살림살이를 영끌하여 무리해서 국내항공사 직항으로 티켓을 끊어주었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드디어 발대식 날이 되었다.
네덜란드로 출국하기 전에 본격적으로 팀코리아 국가대표 선수들끼리 모여서 출전 각오를 다지며 유포코리아 대표님 및 직원분들과 다 같이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식당에 모여 맛있는 걸 먹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낸 후, 선수 한 명씩 돌아가면서 월드컵에 임하는 각오와 하고 싶은 말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모두 비슷한 얘기들을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유포라는 운동이 신기해서 시작했을 뿐인데 스스로 실력이 느는 것을 보며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고, 어느새 국가대표로 선발까지 되어 월드컵에 출전을 하는 기회도 생겼고, 그리고 너무 좋은 동료들을 만나서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
이어서 생각지도 못한 선물 증정식이 이어졌다. 명색이 국가대표인데 본인의 전용 스틱과 링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대표님께서 유포 장비 세트를 선수 모두에게 선물해 주었다. 스틱마다 [국가대표 000]이라는 이름까지 각인이 되어있어 감동이 두 배...! 도대체 어느 틈에 준비를 한 건지... 유포코리아 직원들이 월드컵이 다가옴에 따라 누구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을 알기에 이 예상치 못한 선물이 더더욱 감사하고 소중했다. 선물 증정식이 끝나고 모두가 가슴 벅차하며 이 스틱을 가지고 월드컵에 나가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굳센 다짐을 했다. (하지만 스틱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경우 추가 운반 요금이 발생하는 문제가 생겨 결국 개인 스틱은 님부스 2000처럼 집에 고이고이 모셔놓고 다녀왔다고 한다.)
체육관이 아닌 곳에서 동료들을 만나니 더 친밀해진 기분이었다. 다양한 일상 얘기를 나누며 웃음꽃이 피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아직 유포 월드컵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끝난 듯한 몽글몽글하고 업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건 이렇듯 언제나 설렘으로 가득 찬 긴장감을 주었다.
그리고, 국가대표 유니폼을 맞출 때가 되었다.
유포코리아에서는 팀코리아 유니폼 제작을 위해 개인의 등번호, 유니폼 사이즈, 이름 이니셜 등을 정한 뒤 제출하라고 했다. 이 순간은 나에게 매우 설레는 순간이었다. 내 마음속 조용한 관종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드디어, 태극마크를 단 나.만.의 유니폼이 나오는구나(감격). 그동안은 친구들과 장난칠 때 "야 나 나이 서른다섯 먹고 국대 됐다!"라고 철없이 외치고 다녔지만, 막상 유니폼 제작에 들어가니 이상하게 일생일대의 결정을 앞둔 것처럼 한없이 진지해졌다. 하지만 누구라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생애 첫 국가대표 유니폼을 받게 되는 순간인데, 엄청난 의미부여를 할 수밖에.
유니폼은 두 가지 색상으로 나올 예정이었다. 혹시나 월드컵에서 맞붙은 상대방과 유니폼 색이 겹칠 경우 다른 색으로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색은 아래와 같았다:
- 1번 유니폼: 상의 노란색, 하의 파란색
- 2번 유니폼: 상의 파란색, 하의 하얀색
한국인의 퍼스널컬러에는 파란색 상의가 더 잘 어울리겠다, 아니다, 노란색이 눈에 잘 띄고 쨍해서 유니크하다 따위의 실없는 대화를 동료들과 나누며 유니폼을 입은 우리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시간은 한없이 즐거웠다.
하루종일 등번호와 유니폼 사이즈를 고민하다가 문득 이거 고민할 시간에 경기 실력 늘릴 생각이나 할 것이지 장비빨 세우는 것에 이렇게까지 연연하다니 난 마음가짐이 틀려먹었군,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등번호는 어떤 숫자로 정하지?', '다른 사람들과 겹치면 어떡하지?', '나에게 의미 있는 번호가 있었던가?' 생각보다 더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숫자는 아무래도 7번이었다. 이유는 3가지.
첫째, 손흥민이 7번이니까.
둘째, 나는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니까.
셋째, 그냥 행운의 숫자는 태초부터 럭키 세븐이니까.
다른 후보 숫자도 몇 개 추려봤지만, 첫 느낌대로 가고 싶어서 7번으로 등번호 숫자를 정하고 유포코리아에 제출했다. 의외로 숫자가 겹친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등번호가 마감된 후 각자가 고른 등번호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각각의 사연이 다 다르고 재미있었다.
- 이승희: 14번. 정대만(올라운더)
- 조주영: 41번. 반려견 이름이 '사일'이다.
- 크림: 22번. 생일이 2/22라서 중요한 의미를 두는 숫자엔 늘 22번을 쓴다.
- 밀리: 23번. 유포를 처음 시작한 2023년의 23.
- 오지현: 94번. 1994년생이기 때문.
- 심코치: 10번. 어린 시절 축구선수를 할 때부터 10번만 달고 뛰어서 그 후 운동 할 때 항상 10번으로 뛴다.
- 진보호: 35번. 와이프님 생일이 3월 5일이다. (이쯤에서 모두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이 세상 마지막 스윗가이...!)
듣다 보니 모두의 마음속에 큰 의미가 있는 숫자가 하나쯤은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번호에 대한 애착이 생기니 왠지 이 유니폼을 입고 대충 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도 생겼다.
유니폼 외에도 단복(단체복)을 따로 맞췄다. 하얀색 카라티였고, 앞에는 태극마크 모양을 한 유포코리아 공식 로고, 뒤에는 큼지막하게 KOREA라고 적혀 있었다. 출국하는 날 공항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네덜란드에서 연수를 받을 때 입을 용도였다. 마지막으로, 유포코리아에서 인쇄소를 연결해 주어 태극마크와 유포코리아 로고를 단 더플백까지 완벽하게 갖추게 되었다.
머리부터 발까지 유포 장비로 중무장하고 나니, 내가 정말 국가대표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런 나보다 더 신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엄마였다. 유니폼이 나온 날 집에 가서 유니폼으로 풀 세팅을 하고 짜잔-하고 보여줬더니 진짜 국가대표 같다고 하면서 너무 좋아했다. 등번호는 왜 7번이냐고 묻는 말에 "나 방탄 좋아하잖아"라고 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시긴 했지만 말이다. 모든 게 즐겁기만 한 지금, 이 여유롭고 설레는 마음만 월드컵 때까지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