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에 대하여
나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끈기 없는 내가 한 가지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전화영어를 2년째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때는 2021년 10월. 그때도 지금과 같이 새해가 되기 전 한 살 더 먹는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였다. 부쩍 차가워진 공기에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어! 내년에 34살이라니!’라는 생각으로 한껏 괴로워하고 있었다. '내년부터는 찐 서른 중반이 될 테니 내 인생은 끝났어' -> '안 되겠다. 내년엔 어디 이직이라도 해서 연봉 좀 올려야겠어' -> '외국계로 가야겠다' 라며 무의식의 흐름대로 내달리다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전화영어를 등록해 버렸다.
주5일 하루 25분. 남들 다 영어 공부 할 때 혼자 안 하다가 서른 중반이 되어 시작한다는 게 무척이나 한심하고 웃겼다. 무도키즈로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너무 늦었다는 명수옹의 말을 떠올리다가, 안 하기 위한 핑곗거리 찾지 말고 지금이라도 정신 퍼뜩 차리고 일단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너도나도 글로벌 OTT며 해외배급사며 이직을 하던 때라, 나도 외국계로 이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몰려온 시기라서 무턱대고 수강료 결제를 했다.
그리고 하루 만에 내 선택을 후회했다. 아침 7시 30분에 전화영어를 신청했는데, 눈을 뜬 순간부터 7시 29분이 될 때까지도 제발 전화가 오지 않길 빌었다. 선생님의 급하지만 위급하지 않은 개인 사정으로 오늘은 쉬게 된다든가, 아니면 필리핀 국경일인데 나만 안내를 못 받아서 오늘은 알고 보니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든가 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매일같이 선생님은 나에게 시간 맞춰 전화를 했고, 매일 아침 영어로 된 문장을 만들어내느라 두뇌 풀가동을 하고 나면 과부하가 걸려버렸다. 그렇게 진땀 나는 25분간의 전화를 끊고는 한숨 푹 쉬며 하루를 시작하는 게 나의 일상이 되었다. 내돈내산으로 이렇게까지 괴로워해야 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고등교육을 다 받을 때까지 난 도대체 뭘 배운 걸까? 하는 놀라움이 더 커서 일단은 되는 데까지 해보기로 했다. 수강료도 3개월, 6개월 패키지로 끊으면 할인률이 더 높았지만, 나는 매번 이번달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했기에 딱 1개월씩만 등록을 했다. 다음 달 재등록 연락이 올 때면 눈 질끈 감고 "한 달 연장할게요"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1년 반이 되었고 그 시점에 유포 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오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로 출발하기 며칠 전, 동료들과 대화를 하던 중 누가 질문했다.
"혹시 영어 되시는 분?"
정적만이 흘렀고, 나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나는 영어로 대화를 두 마디 이상 해본 적이라고는 필리핀 전화영어 선생님인 Lyn 선생님과의 대화가 유일했으니까. 내 영어 실력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내가 어느 정도까지의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네덜란드에 와서 가장 놀랐던 순간은 생각보다 더 자신 있게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인지했을 때였다. 나는 대학교 때 영어 필수교양도 친구들 따라서 호기롭게 원어민 수업으로 광클했다가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 두려워서 여러 수업을 자체 휴강한 끝에 C를 받았고 영어는 어차피 다시 들어도 모르겠다며 재수강마저도 포기한, 문과인데 영포자인 사람이었다. Lyn 선생님도 스카이프로만 통화를 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얼굴을 직접 보며 영어로 대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에 와서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숙소로 가는 교통편 마저 헷갈린 순간, “Do you need help?”라는 친절한 도움의 손길에 눈이 번쩍, 아니 뇌가 번쩍 뜨이며 생존 영어가 나와버린 것이었다. 나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반쯤 렉 걸린 듯한 상태로 말을 끝낸 후 한숨 돌리고 나니 동료들이 ‘오~’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엄지척을 날려줬다. 물론 완벽한 영어는 아니었지만, 이거라도 어딘가 싶은 순간이었다. 지난날의 괴로웠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1년 반 동안 매일같이 마음속으로 울면서 전화를 끊었던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나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한 Lyn 선생님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전화영어를 한 지 1년이 되어갈 때 실력이 전혀 늘질 않아서 계속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성장이란, 시작한 순간부터 꾸준히 정비례 그래프처럼 우상향 하는 그림이었는데, 알고 보니 실제 성장이란 긴 겨울잠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고의 시간 끝에 퀀텀점프하듯이 어느 날 갑자기 실력이 쑥 늘어나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인내했던 나 자신에게 셀프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같이 인내해 주고 끌어준 Lyn 선생님에게도 한국 돌아가서 꼭 감사 인사를 전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꾸준히 전화영어를 했던 성실함과는 별개로, 이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력서를 쓰는 게 너무 귀찮았기 때문이다.
대회 D-1: 유포 게더링 행사
꾸준히 해온 전화영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또 있었는데, 바로 유포 월드컵 하루 전 날인 유포게더링 날이었다.
유포 대회가 열리기 하루 전에, 다 같이 암스테르담을 관광하며 각 나라 선수들끼리 서로 인사도 하고 아이스브레이킹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암스테르담 중앙 기차역 앞에서 한 두 팀씩 모이기 시작했다. 어색한 공기와 서로 예의를 지키느라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일본 국가대표팀(두둥!). 인원수는 팀코리아 보다 많았고, 성비는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남자가 더 많았다. '일본'팀이라는 존재만으로도 팀코리아 선수들 사이에서 약간의 긴장감이 흘렀으나 그 와중에 타국에서 동양인을 만나니 묘한 동질감도 들었다. 일본팀의 주장은 유포코리아 대표님과 여러 번 봤던 사이라 두 사람은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새 학기가 시작할 때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인 이질적이고 어색한 분위기를 지금 여기서 다시 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캐나다팀이 도착했고,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양쪽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달려가 인사를 했다. 내일 참가할 네덜란드 팀 몇 팀을 제외하고 외국인 팀은 다 모였고, 그렇게 오늘의 기나긴 일정이 시작되었다.
1. 유포 본사 방문
먼저, 교회로 지어진 유포 본사를 방문했다. 사무실은 유포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교회 강당은 여전히 교회로 운영되고 있었다. 오르간도 있고, 예배를 드리는 의자들도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 선수 중에서 본업이 피아니스트인 선수가 있었다. 이번 유포 월드컵을 기념하여 피아노 자작곡을 연주하는 시간이 있었고, 센스 있게도 마지막 곡으로는 비틀즈의 Let it be를 연주하여 단체 떼창으로 훈훈하게 끝이 났다. 참가한 사람들의 연령이나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팀과 일본팀의 특이한 점은 유독 직장인이 많이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서양팀들의 경우 주로 20대 대학생과 그 이하로 구성된 팀이 많았다.
2. 크루즈 관광
교회를 한 바퀴 구경 하고 난 뒤, 크루즈투어가 있었다. 다 같이 암스테르담 운하로 이동하여 단체 크루즈에 탑승했다. 암스테르담을 1시간 돌면서 주변을 관광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 오히려 이 시간이 게더링의 장이 되어버려서 사실상 주변 관광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각 나라 선수들끼리 통성명을 하고 알아서 친해지는 오픈 스탠딩 파티 같은 분위기였는데, 왠지 여기서 기죽으면 안 될 것 같은 알량한 자존심이 발동했다. 유포코리아 직원이 작년 유포컵에서도 만났던 체코 선수들이 있어서 반갑게 인사를 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자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일본 선수들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역시 'K문화'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 게 처음에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에서 조심스레 대화를 시작했으나, 내가 다니는 영화사에서 만든 작품이 인생작인 일본 선수가 한 명 있었고, 이 선수가 극도로 흥분하며 일본팀으로 달려가 그 사실을 전달하고 나니 왠지 분위기가 좀 더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3. 유포 경기
보트 관광 일정이 끝난 후 반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 등 유명 미술관이 모여있는 뮤지엄플레인이라는 공원까지 걸어갔다. 여기서 다 같이 유포 랠리를 하며 간단한 경기를 즐겼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슨 스포츠냐고 말을 걸어왔고 개중에는 한번 해보고 싶다며 직접 그 자리에서 유포를 배워보는 사람도 있었다. 역시 재미있어 보이고 해보고 싶게 만드는 게 유포의 매력이었다.
유포 경기를 하면서 서로 알게 모르게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100%의 전력으로 뛰는 건 아니었지만 특출 나게 잘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나와 같은 팀으로 경기를 한 일본 선수(이자 일본 팀 주장)이었다. 링을 개떡같이 던져도 찰떡같이 받아서 1차로 놀랐는데,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것을 보며 2차로 놀랐다. 이 선수가 속한 팀이 이번 월드컵에서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후의 땡볕이 너무 뜨겁고 그늘은 하나도 없는 드넓은 공원에서 유포 경기를 하다 보니, 사람들이 지치기 시작했다. 이미 이전 스케줄로 힘을 한껏 소모한 상태라 텐션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낙오되어 구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경기는 이쯤에서 마치고 다음 일정(!)을 향해 이동했다.
4. 유포 게더링
다시 유포 본사로 돌아와서 간단한 간식거리를 먹은 후에 유포에 관한 퀴즈를 맞히는 시간이 있었다. (사실 이때쯤부터 선수들이 눈에 띄게 지친 모습을 보였으나, 프로그램 일정이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활동을 위한 팀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다른 국적의 사람들과 팀을 해야 했다. 나와 승희 선수는 일본 여자 선수 두 명과 함께 한 팀을 만들었다. 승희 선수가 일본어를 떠듬떠듬할 줄 알아서 그 친구의 어설픈 일본어와 더불어 번역기, 손짓, 몸짓 등 온 방법을 총동원해서 대화를 나눴다. 처음에는 유포에 관한 간단한 퀴즈를 다 같이 맞추는 거라 난이도가 괜찮았다. 그러다가 두 개의 팀을 또 합치게 되어 8명이 한 팀이 되었는데 우리 팀은 한국인 2명, 일본인 6명이었다.
그런데 퀴즈는 온데간데없고 갑자기 토론타임이 시작되었다. 동양인이 가장 약하다는 분야, 바로 자유 토론. 총 3개의 큰 주제로 토론을 해야 했는데, 유포의 앞으로의 운영 방안, 규칙 제안, 홍보 방안 아이디에이션 같은 포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주제들이었다. 마치 무임금 인턴에게 회사 아이디어를 내라고 해서 쏙 뽑아먹듯이, 주제들이 꽤나 심층적이라 이걸 우리가 고민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이루어진 팀에서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아야 한다라... 숨 막히고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나는 어제부터 이미 경험한 영어에 대한 자신감으로 잔뜩 무장한 상태였고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까지는 고려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항상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사람이랑만 이야기를 나눠봤지,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복병이 예상되었다. 심지어 토론의 결과에 대해서는 팀별로 돌아가면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발표까지 해야 했다. "발표 누가 하실래요?" 한국어로도 꺼내기 어려운 말을 일본인들에게 해야 했다. 다행히도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일본 선수가 한 명 있어서 그와 내가 번갈아가면서 발표를 하기로 했다. 토론은 정말 숨 막히면서도 진땀 빼는 순간이었지만 각자가 다양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의사소통을 시도했고(대부분이 번역기였다)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내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다른 해외 선수들도 이후에는 나에게 더 편하게 말을 걸게 되었고, 오히려 그 힘든 토론 시간이 있었기에 그 이후에 더 많은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게 되었다.
...5. 저녁...
저녁에는 전 세계 음식을 파는 것으로 유명한 푸드할렌이라는 곳에 가기로 했다. 이것은 크나큰 판단 미스였으니... 출발할 때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다 함께 도보로 그 장소까지 걷기 시작했는데 10분이면 나올 줄 알았던 곳은 알고 보니 30분 이상을 걸어야 갈 수 있는 아주 먼 곳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하루종일 걷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점점 말이 없어지며 묵묵히 걷기만 했다. 다리도 너무 아프고 전체적인 컨디션이 훅훅 떨어지고 있었다.
당장 내일이 유포 월드컵인데 이렇게까지 체력적으로 고갈시켜도 되는 건가? 이거 경쟁팀들 지치게 하려는 전략 아니야? 따위의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걸었는데, 정말 아무리 걸어도 도착을 안 하는 것이다. 중간에 그냥 돌아갈까도 고민했지만 이미 저녁 시간은 한참 지났고, 얼른 가서 빨리 먹고 해치우자는 마음으로 버텼다.
드디어 도착한 푸드할렌은 역시나 먹을거리가 다양해서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사서 나눠먹었다. 모두가 지쳐서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먹기만 했다. 내일 못 일어나겠는데, 싶을 정도로 혼이 빠져나간 상태라 걱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네덜란드 선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일정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필참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시, 이것은 계략이었던 것인가!
늦은 저녁을 다 먹고 나서, 다시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우리는 또다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중간에는 정말 다리가 끊어질 것 같아서 택시를 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내가 돈 다 낼 테니 택시 타고 가요!"라고 외쳐보았지만, 택시 한 대 보이지 않는 한적한 이곳에서는 그저 말을 아끼고 빨리 걷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숙소에 돌아왔고, 내일을 위해 얼른 들어가 쉬기로 했다.
녹초가 된 상태였는데, 숙소 바로 옆방을 쓰는 밀리가 들어왔다. 밀리는 팀코리아의 막내 선수였는데, 제일 젊은 와중에 물리치료학과 졸업반이기까지 했다. 즉, 우리 팀에서 최연소 선수이자 팀닥터이자 팀 전체 평균연령을 2살이나 낮춰준 없어선 안될 필수 인력인 셈이었다. 들어와서 나와 승희 선수에게 다리 마사지를 해주었다. 본인도 피곤한 와중에 다른 선수들 피로를 풀어주겠다고 시간을 내고 에너지를 쓰는 게 너무 고맙고 대단해 보였다. 저 넘치는 체력의 근원지는 젊은 나이 때문일까? 알 수 없었지만 고마움의 표시로 줄 수 있는 게 신라면 컵라면뿐이라 과감히 넘겨줬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기나긴 하루가 끝이 났다. 내일은 정말 최최종 실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