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만이 살길일지니
나는 1월에 유포 무료연수를 들었고, 2월에 정식으로 유포코리아 동호회 회원이 되었다. 동호회는 무료연수를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회원가입을 받았고 2월부터 본격적으로 운영을 시작하여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되었다. 동호회에는 연수를 같이 들었던 사람들도 있었고, 나보다 몇 달 먼저 연수를 들어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앞으로 매주 함께 할 사람들이었다. 유포 전용 체육관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유포코리아에서 매번 체육관 예약 티켓팅을 통해 장소를 대관했다. 매번 다른 곳에서 동호회 모임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체육관 위치에 따라 참석하는 사람들도 달라졌다.
동호회는 매주 2시간씩 운영되었는데, [몸풀기] - [동작 연습] - [동작 활용 게임] - [경기] 순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2월에는 연수를 딱 한 번씩만 들어본 사람들끼리 모여 동호회를 시작했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모두가 제로베이스에서 똑같이 시작을 하는 거다 보니 함께 으쌰으쌰 하는 마음으로 동작 하나하나를 열심히 배워나갔다. 나보다 더 일찍 연수를 들었던 사람들은 몇 달 만에 유포를 배우는 거라 스틱을 잡는 기본 동작도 잊어버린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유포코리아 동호회 모임을 매주 운영하면서 코칭까지 해주는 강사님이 두 분이 계셨는데, 이 분들은 회원들을 모아놓고 인내심 있게 기본 동작부터 룰까지 모든 것을 차근차근 다시 가르쳐주었다. 회원 중에는 처음 배우는 동작도 금방 익히는 회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다른 운동(하키, 아이스하키, 축구 등)을 이미 취미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부터 운동을 해오던 사람과 유포가 첫 운동인 사람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기본기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링을 던지는 기본 동작인 포핸드, 링을 잡고 있는 선수를 바로 앞에서 막는 블로킹, 블로킹을 피해 링을 던지는 백핸드 등 매주 한 동작씩 새로 배워 나갔다. 새로운 동작을 배우고 나면, 경기 시간에는 가급적 해당 동작을 최대한 많이 활용해서 경기 플레이를 해야 했다. 배우고 바로 잊어버릴 수 있는 새로운 동작을 더 확실하게 몸으로 기억하고 각인시킬 수 있는 연습 방식이었다.
매주 연습을 하다 보니 느낀 점은, 동호회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짜여 있어서 동작 하나를 익숙해질 때까지 익히려면 2시간의 동호회 모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건 나처럼 운동과 내외한 기간이 워낙 길어서 아직도 남들 따라가려면 갈 길이 먼 사람들에 한해서만 해당되는 얘기지만 말이다. 유포코리아에서는 유포 장비를 별도로 판매하고 있었는데, 따로 연습을 더 하길 원하는 동호회 회원들을 대상으로는 보유하고 있는 스틱과 링을 일정기간 무료로 대여해 주는 서비스를 오픈했다. 나는 동호회에서 경기를 할 때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경기를 하는 것 같아 개인 연습을 더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매주 새로운 동작을 배우는 것에 한껏 신이 나서 의욕이 넘쳐났다. 동호회에 같이 다니는 친구와 따로 날을 잡고 추가 연습을 하기로 하고 스틱과 링 대여 신청을 했다.
그리고 한 달간 아무런 연습을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나의 의지박약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었다. 가슴에서 솟아나는 열정과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연습이 아직까지는 많이 부족했다.
영광의 상처
처음 유포를 시작할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바로 물집과 굳은살과의 싸움이었다.
2시간 내내 스틱을 쥐고 힘을 쓰다 보니 연습이 끝나고 나면 양손에 물집이 잡히거나 살이 쓸려서 벗겨지고 상처가 나 있는 경우가 생겼다. 평소에 그다지 귀한 취급을 받는 손은 아니었지만, 운동 강도가 그다지 센 것 같지 않은데도 같은 부위를 계속 사용하다 보니 확실히 압박감이 느껴졌다. 대일밴드를 덕지덕지 붙이고 연습을 해봤지만 그마저도 계속 밀려서 자주 갈아줘야 했다. 결국 회원들과 같이 헬스용 장갑을 사서 한동안 사용해 봤다. 쿠션감이 생겨서 상처는 더 이상 나지 않았지만, 손에 땀이 차는 게 더 불편해서 나는 결국 다시 대일밴드로 합의보고 연습을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습량이 많아지면서 초반에 크게 생겼던 상처들이 아물고 다시 상처 나고 또다시 아물면서 그 자리에는 굳은살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 시점 이후로는 더 이상 물집이 생기지 않았고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처음에는 손 모양이 더 투박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컸다면, 연습을 하다 보니 차라리 빨리 굳은살이 생겨서 자잘한 것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유포 자체에 더 집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굳은살이 생기면서 대일밴드도 떼버릴 수 있었다. 같은 기간 동안 운동한 회원들끼리 우리가 드디어 전문선수(?)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며 셀프 칭찬을 했다. 수치로는 보이지 않는 꾸준한 노력의 결과를 증명해 주는 상처라고 생각하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너 유포 어디까지 해봤니? 난 이 정돈데.
예전에는 보이는 곳에 나는 작은 상처 하나에도 속상해했겠지만, 이제는 나의 삶의 방식과 취향이 고스란히 남는 거라는 것을 알기에 어느새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국가대표 선발
그렇게 유포코리아 동호회를 2월과 3월에 걸쳐 열심히 다니고 3월의 막바지에 달하고 있을 때였다. 단체 카톡방에 공지가 하나 올라왔다.
[2023년 네덜란드 유포 월드컵 출전 국가대표 선발 일정]
심장이 두근두근 설레발을 치기 시작했다. 유포코리아 동호회가 만들어지던 초창기에 유포코리아 대표님과 강사님들이 지나가는 말로 기회가 된다면 올해 네덜란드 유포 월드컵에 팀을 꾸려서 참가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하고 빠르게 선발 기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우선, 실력. 당연하다. 그리고, 성실성(!)
그렇다. 유포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기준은 실력 100% 순이 아니었다. 실력을 포함하여 그동안 동호회에 얼마나 열심히 참여했는지, 얼마나 재미있게 즐겼는지를 유포코리아에서 선수 관리 차원에서 다 지켜보고 기록을 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동호회 출석을 1회만 하고 그 후에 나오지 않은 에이스보다, 출석을 5회 하고 부족한 실력을 꾸준히 늘려가는 중인 사람을 우대한다는 뜻이었다.
나, 어쩌면... 이번 생애 태국마크 달기, 가능할지도?
국가대표 신청 방식은 간단했다. 이제 막 우리나라에서 동호회가 운영되기 시작한 스포츠였기에, 선발전 같은 피 튀기는 과정은 없었다. 이미 유포를 배우고 있는 회원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신청 자격이 있었다. 공지가 나간 후 주어진 신청 기간 안에 신청을 하면 끝이었다. 며칠간의 고민과 생각 끝에 간단한 개인정보 및 필요 사항을 기재하여 국가대표 신청서를 제출한 후 긴장 상태로 지냈다. 동호회에 나갔더니 유포 강사님 왈, 예상외로 신청자가 많았다고 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뽑힐 것도 같았고, 강사님의 말을 들어보면 떨어질 것도 같았다. 동호회 모임에서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국대 신청하셨어요?”가 그 주의 인사를 대신했다. 나는 얼마나 열심히 하는 회원에 속할까? 유포코리아가 판단하기에 나라는 사람은 선수로 뽑아놨을 때 유포를 즐기고 좋아하면서도 1인분의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볼까? 나는 즐긴다고 생각하지만 제 3자가 보는 내 모습도 그래 보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선발 결과 문자가 왔다.
결과는 합격.
엄마 나 국대 됐어!
유포 월드컵은 작년에도 네덜란드에서 소소하게 개최 됐었지만, 각국에서 참여하는 큰 규모의 유포 월드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별 참가 가능 팀 수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즉, 한 국가에서 참가 팀 여러 개를 내보낼 수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체 선수를 포함해 4명으로 이루어진 팀을 두 팀 등록하기로 했다.
국가대표 선발 이후에는 모든 게 착착 진행되었다. 대학교 졸업반이었던 20대 선수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직장인이었기에 유포코리아에서는 각 회사에 전달할 협조 공문을 작성해 주었다. 유포월드컵에 선수 등록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여권을 제출하고, 전체적인 일정을 체크하고 빠르게 비행기표를 알아보는 등 모든 게 여유 없이 굴러갔다.
4월부터는 동호회 모임도 매주 수요일, 토요일 두 번으로 늘어났다.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지만 연습량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라 빠지지 않고 갔다. 이때까지도 유목민처럼 이 체육관 저 체육관을 뺑뺑이 돌면서 연습을 하러 다녔다. 평일에는 매주 저녁 시간을 빼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가능한 여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연습에 참여했다.
주 2회로는 왠지 성에 차지 않아서 결국 대여한 뒤 방치해놓고 있던 스틱과 링을 (드디어 꺼내서) 친구들과 따로 연습을 하기로 했다. 상암 월드컵경기장 앞 공원에서 연습을 했다. 처음 보는 스포츠에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이게 무슨 운동이냐' ‘어떻게 하는 거냐'며 한 번씩 말을 걸었다. 우리가 놀고(?) 있는 게 재밌어 보였는지 근처에서 농구를 하던 학생들도 다가와서 홀린 듯이 날아가는 링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때가 4월이었으니 유포 월드컵까지는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