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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초 Jun 06. 2016

빠이에서의 여러 날들

허니문을 가장한 하드코어 배낭여행(9)

우리는 빠이의 슬로건(Do nothing in Pai)에 걸맞게,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보냈다. 늦잠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고, 태양이 너무 뜨거운 한낮에는 해먹에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고, 그렇게 멍을 때리다 들판 너머로 지는 해를 둘이 나란히 앉아 바라보고, 해가 지면 슬슬 시내로 걸어나가 게으른 고양이처럼 어슬렁어슬렁거렸다.



그래도 몇 가지의 일들을 얘기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오아시스 빠이의 안주인, 미오의 오토바이 짐칸에 실려 브런치 카페에 갔다.

 

코너가 제일 먼저 추천해 준 빠이 맛집이기도 한데, 과연 그러할 만했다. 킹왕짱 맛있었고, 세상 더없이 행복한 브런치 시간이었다. 빠이에 머무는 동안, 매일매일 오겠다고 다짐했다.  

오토바이 뒷 수레에 실려 점심 먹으러 가던, 세상 신나는 길

내 생전 이렇게 맛있는 브루게스타는 처음!


2. 야시장을 구경했다. 치앙마이가 단연 우위다. 


이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야시장 하면 치앙마이, 치앙마이 하면 야시장이다. 세상 어느 곳을 간들 이 명제가 깨질지 모르겠다. 빠이에 독특한 수공예품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보다는 클럽이나 바에서 자유로이 연주하는 음악가들과 그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매력적이었다.  

시암 북스. 여행자 거리에 있는 유명한 중고 책방인데, 이곳에서 완전 보물(켈스의 서)을 발견했다. 심지어 단 한 권 있던 거! 요건 나중에 찬찬히 보여드리겠음.

내가 요러고 두건 쓰고 돌아다녔더니

따라하는 배태봉. 나날이 패션 진화 중


3. 빠이에서의 마지막 날, 누가 뭐래도 빠이의 넘버 원 레스토랑이라는 Na's kitchen에 갔다.

 

족히 한 시간은 줄을 서서 기다렸을 것이다. 줄까지 서가며 먹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맛있다는 곳에서 빠이의 마지막 저녁을 기념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고, 이왕 먹는 거 제대로 '빅 디너'를 즐기겠노라 마음먹었다. 맛있다는 건 다 먹어봐야지.

나는 똠얌꿍이랑 마사만 커리랑 쏨땀. 당신은?

그는 메뉴를 말하는 대신, 탐탁잖은 표정만 짓고 있다.

그는 세 가지 요리면 우리 둘이 함께 먹을 수 있지 않겠냐고 했고, 나는 나의 빅 디너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게다가 똠얌꿍은 스프고, 쏨땀은 샐러드다. 메인 요리는 하나란 말이다). 평화는 깨졌다. 그래, 음식을 많이 시키면 돈도 더 많이 들고(이 쫌생아!), 음식 쓰레기도 나오고(니가 지구를 다 구해라!), 과식하면 건강에도 안 좋다(아 쫌 내비둬!)는 거지만, 아 진짜 쫌!!!! 나는 야심차고 아름다운 '빅 디너' 계획에 초를 친 이 남자가 너무 미웠다. 결국 캐슈넛볶음밥을 하나 더 시키는 걸로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이미 기분은 뽀로롱.

엎친 데 덮친 격, 음식까지 줄줄이 별로였다. 트립어드바이저를 뒤덮고 있던 그 찬사는 누구에게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저 그런 커리와, 너무 달짝지근한 똠얌꿍, 캐슈넛볶음밥은 질척한 밥에 캐슈넛이 숨바꼭질 하듯 꽁꽁 숨어있었다. 역시 세상에 줄 서서 먹을 음식은 아무것도 없구나. 트립어드바이저만 의지해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런 행동은 이제 하지 말아야겠다. 지나가다 배고플 때 먹는 밥이 최고이고, 아무 로컬 식당에 들어갔는데 싸고 맛있으면 그게 기쁨인 거다.


4. 저녁을 먹고 간 art in chai에서 한국인 모녀를 만났다.

 

리타 할머니와 메리에 이어, 이번엔 한국인 모녀를 만났다. 다른 곳도 아니고, 히피풍이 물씬 느껴지는 아트인차이 카페에서. 이런 곳에 엄마와 함께 올 수 있다는 게 참 멋져 보여서, 우리 옆자리에 앉아있던 그들을 가만가만 바라보곤 했다. 라이브 연주가 끝나고,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시죠?" (요것이야말로, 한국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 말문을 트게 하는 단 하나의 문장. 외국에서 마주친 한국 사람들의 관계는 이 문장 전과 후로 나뉜다.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탐색하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다가, 어느 한 편에서 이 문장을 던지는 순간 봉인이 해제되는 마법의 문장.)

  

우리가 신혼여행 중이라고 했더니,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딸이 "와아아아!" 탄성을 지른다. 자기 꿈이 신혼여행으로 빠이에 오는 것이라고. 연인과 함께 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오는 사람들이 정말 있긴 있구나, 그녀가 엄마에게 속삭인다. 네, 우리들이랍니다.

"얼마나요?" "한 달이요." "와아아아-"

연이어 탄성을 지르던 그녀가 또 묻는다.

"신혼여행이면 좋은 데 가고 싶지 않았어요?"

"여기가 충분히 좋은 곳인 걸요."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빠이로 신혼여행을 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바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렇게 오는 사람들이 있구나 알게 됐어요. 저에게 동기부여가 됐어요."

그러더니 다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나도 이렇게 코드가 잘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음. 바로 조금 전에도 열나게 싸웠지만, 우린 코드가 잘 맞는 커플인가 봐. 코드가 맞지 않으면 여긴 신혼여행으로 올 수 없는 그런 곳 이래. 하긴, 좀 그런 거 같기도 해. 그러니까 우리, 아까 싸웠던 건 잊어버리자 ㅎㅎㅎ


5. 그리고, 아트 인 차이 Art in Chai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날들 중에도, 저녁에는 매일 빠짐없이 아트 인 차이art in chai라는 곳에 갔다. 빠이에서 느껴지는 관광지의 냄새, 도시의 냄새에 실망했을 즈음, 아트 인 차이를 만났다. 공연을 하는 아티스트들도 빠이에 머물고 있는 여행자들인 듯, 카페에 모여든 이들과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포옹하고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넘치는, 몹시도 자유롭고 평화롭고 느릿한 분위기였다.


이곳에서는 매일 라이브 연주가, 목요일에는 Spoken words가 열린다. Spoken words는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 시, 경험, 음악을 나눌 수 있는, 모두의 무대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음을 몸으로 마음으로 즐기며 화답하는 여행자들 속에서, 아직 남아있는 빠이의 히피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아트 인 차이는 내가 꿈꾸었던 빠이를 잠시나마 경험했던 순간이었고, 빠이에 있는 것을 조금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곳이다.


아트 인 차이의 이런 분위기 (이곳에서 메리를 또 만났지!)


6. 코너와 미오의 로맨틱 스토리


나는 빠이에서 몇 조각의 다이아몬드를 얻었다. 리타 할머니와 메리, 오아시스 빠이, 아트 인 차이가 그 각각의 조각들이다. 리타 할머니와 메리, 오아시스 빠이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화에 했지만, 오아시스 빠이를 운영하고 있는 부부의 특별한 이야기를 좀 더 소개할까 한다.


코너와 미오는 오아시스 빠이의 주인 부부다. 미오는 아직 영어를 잘 하진 못해서 주로 코너와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는 진정, 내가 만난 최고의 오너다. 내가 지금껏 묵은 게스트하우스가 몇 군데쯤 될까? 100군데? 200군데? 이틀에 한 곳씩만 계산해도, 400곳은 되겠다. 사흘 묵는 곳도 있고, 나흘 묵는 곳도 있으니까 아주 헐렁하게 계산한다 해도 300곳은 넘을 것이다. 전 세계 그 많은 숙소들 중, 나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코너를 베스트 오너로 꼽겠다. 그는 우리를 처음 맞이하던 순간부터 헤어질 때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친절했고, 언제든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서곤 했고, 배려 깊은 대화를 할 줄 알았고, 심지어 위트까지 있었다. 아침을 먹고 한가로이 늘어져 있다가 코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러다가, 영국인인 코너가 어떻게 아시아의 깊고 깊은 시골마을 빠이에 오게 되었는지 듣게 되었다. 햇볕처럼 따스한, 그들 부부의 로맨틱한 스토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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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가 배낭여행으로 태국에 왔던 건 2012년. 태국 여러 도시를 여행하다 치앙마이에 왔고, 우연히 친구를 따라 깊은 시골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수 부족 마을에서 두 달을 보냈다. 그곳에서 미오를 만났고,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서로의 언어는 전혀 몰랐지만, 둘은 사랑에 빠졌다.


코너는 부족의 전통대로, 5만 밧 지참금을 지불하고 미오와 결혼했다. 미오의 고향은 떠나왔지만 한 번도 도시를 경험한 적 없는 미오가 갑작스러운 혼란을 겪지 않도록, 두 사람은 미오의 고향만큼이나 깊은 시골 마을로 들어갔다. 차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으로.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서로에게만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던 그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며 2년을 살았다. 더없이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했다. 그 후 빠이로 이사를 왔고, '오아시스 빠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했다. 이젠 예전만큼의 시간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일생의 일정한 기간을 그렇게 함께 보내며 축적된 힘이 있을 것이다.  



코너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했다. 그의 삶은 어느 한 순간에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그런 일이 '일어나'버렸고, 그는 완전히 바뀐 삶을 '선택'했다.

"영국으로는 왜 돌아가지 않았어요?"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의 삶은 매일이 똑같았어. 눈 뜨면 회사 가고 집에 오면 지쳐 잠이 들고, 눈 뜨면 회사 가고 집에 오면 잠이 들고. 아버진 그렇게 평생을 살았어. 대체 무엇을 위해서? 영국이란 나라는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지. 아버지는 행복하지 않았고, 나는 아버지의 삶을 지켜보며 생각했어. 나는 다르게 살겠다고."   


한국은 어떠한지 차마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아니, 말해 무엇하리. 그보단 그의 용기의 근원을 밝히고 싶었다. 꿈의 유예 앞에서 자꾸 생각이 많아지던 때였다.       


"그래도 망설여지지는 않았어요?"

"우리는 모두, 한 번 인생을 살잖아."


인생이 한 번 뿐이라는 것은, 그 명제를 온전히 살아낸 사람을 만났을 때 뻔하지 않은, 정신을 번쩍 깨우는 말이 되는 것 같다. 무수한 타인의 삶을 만나고, 그로 인해 내 인생을 생각하고, 충돌의 동력을 얻는 것. 사회가 규정하는 행복의 조건을 따르지 않고, 나만의 행복의 언어를 발견해가는 것. 내가 어느 때 행복한지 깨닫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중심 딱 잡고 용기를 내는 것. 나는 이 모든 것을 여행으로부터 얻고 있다.

코너와 미오 사진을 찍어주다가, 우리도 찍혔다 ^^


7. 오두막 풍경  


오아시스 빠이에서 사흘을 묵고 더 연장하려니 방이 없어서, 다른 오두막 숙소로 옮겼다. 우리가 묵는 오두막에서 창문을 활짝 젖히면 이런 풍경이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한 시간을 갖고 싶어 지는 그런 풍경이.

 

서로가 몰래 찍은, 상대방의 멍 때리는 모습. 어쩜 앉아있는 자세도 똑같아


"여보, 참 좋다."


먼저 창가에 앉아있던 그가, 나를 손짓하며 불렀다. 숙소 이곳저곳 둘러보던 나도 그의 곁으로 가 앉았다. 우리는 나란히 창틀에 걸터앉아,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가만히 들판을 바라보며 있었다.

  


이 풍경이야말로, 내가 빠이를 생각하며 상상했던 그런 풍경이 아니었을까. 세상 근심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는 그런 풍경. 내가 덜 가진 것도, 가지고자 욕망했던 것도 아무 의미 없어지는, 지금 있는 것으로 충분해지는 그런 풍경. 오아시스 빠이의 호숫가, 그리고 이 오두막 풍경은 마치 <월든>의 책 속으로 들어가 있는 듯한 시간을 선사해주었다.


나는 이제 빠이를 떠난다. 앞으로 빠이를 생각하면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숙소에서 바라보이던 풍경, 새들의 노래, 햇살, 야자잎이 바람에 사그락 거리는 소리, 그 고요와 평화로움이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나의 오랜 로망이었던 빠이를 기리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몇 장의 사진 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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