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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초 Jul 07. 2016

라오스를 향해

 허니문을 가장한 하드코어 배낭여행(10)  

태국에서 라오스는 슬로 보트로 넘어가기로 했다. 치앙마이에서 봉고를 타고 달리다가 태국 국경마을(치앙콩)에서 1박, 다음날 슬로 보트를 타고 메콩강을 떠내려가다 라오스 국경마을(훼이싸이)에서 1박, 다시 슬로우슬로우 흘러가다 3일째 저녁쯤 루앙프라방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지루함의 끝장이라고들 했지만, 나는 하릴없이 메콩강을 따라 흘러가는 느린 시간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뱃삯과 오늘 저녁 밥값을 떼고 남는 돈을 세어보니 600바트(2만원 정도). 이걸 국경에서 라오스 돈으로 바꾸면 12만낍. 딱 좋아. 이 돈이면 루앙프라방까지 갈 수 있겠다. 환전한 돈이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지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다. (알고 보니 국경의 물가는 훠얼씬 더 비쌌지만..) 


치앙마이에서 태국의 최북단 국경마을, 치앙콩까지는 다섯 시간 가량을 달렸다. 숙소에 대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멀쩡해서 오히려 깜짝 놀랐다. 온갖 흉흉한 경험담과 더불어, 인생 최악의 숙소로 치앙콩을 꼽는 사람들이 많던데. 마음을 비운 덕인가, 세수라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샤워까지 하고서 꿀잠을 잤다.  


# 이제 큰 폭풍이 올 거야


내가 여전히 쿨쿨 자고 있는 동안 태봉은 이른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다. 엄청 상쾌해 보이는 저 얼굴과 눈이 부은 내 얼굴. 나도 아침형 인간이 되어서 산책 같은 거 해보고 싶다. 내 나이 오십쯤 되면 아침잠을 양보할 수 있을까.  


토스트 두 쪽과 계란 프라이, 바나나로 단출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국경에 도착하니 슬로 보트를 타는 여행자가 백 명은 되어 보였다. 라오스에 한국 사람들이 그리 많다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유일한 동양인인 듯.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만 무비자로 라오스에 입국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라오스 관광에 한국이 혁혁한 공을 세우기는 하는가 보오..) 


라오스 비자 서류를 작성 중인 무리들. 입국 심사대 앞에는 엄청나게 긴 줄이, 엄청나게 느린 속도로 줄어들었지만, 우리는 무비자 통과. 어차피 선착장까지 함께 이동해야 해서 근처에서 어슬러어슬렁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기운이 심상치 않다.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커다란 장막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불길한 전조다.     

치앙마이를 떠날 때였다. 

우리에게 슬로 보트 티켓을 팔았던 여행사 아줌마가 말했다. 


"이제 큰 폭풍이 올 거야. 대비하도록 해" (아니, 그걸 이제야 얘기하면.... )


꼬박 이틀을 강물 위에서 보내야 하는데. 우리.. 죽진 않겠지? 보트가 뒤집히는 일이 없기만을. 그래, 강이니까 헤엄치면 죽진 않을 거야. 

폭풍 전야의 두려움을 안고 보트에 올랐다. 하지만 보트가 출발하자마자, 또 다른 치명적인 난관이 찾아왔다. 바람막이 천 하나 없이 사방이 뻥뻥 트인 배 안으로, 빗방울과 물보라가 뒤섞여 투두 두둑 온몸을 가격해왔다. 메콩강을 감상하며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기는 개뿔, 비에 젖은 새양쥐 몰골이 되고 말았다. 

처음엔 이렇게 앉아있던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고개 숙인 죄수 꼴이 되고 말았다

얼굴 싸대기를 쉬지 않고 날려대는 빗방울에 고개를 들고 있을 수가 없어, 의자 아래로 내려갔다. 의자 앞뒤 간격이 너무 좁은데다, 물이 흥건해 바닥에 앉을 수도 없어 벌 받는 듯 쪼그린 채 의자에 얼굴을 묻었다ㅠㅠ 춥기는 왜 또 그렇게 추운지. 한국을 뒤덮었다던 한파가 이곳에도 들이닥친 게 틀림없다. 치앙마이까지만 해도 계속 민소매를 입고 다녔던 우리는, 별다른 두꺼운 옷도 챙기지 못해 덜덜 떨었다.  

근데 밥은 언제 나오지? 도시락을 나눠 줄 기미가 없다. 표 값에 오늘 점심 도시락이 포함되어 있댔는데. 이 꼬락서니에 배까지 고프니 거지가 따로 없다. 참을 수가 없어, 보트에 오르기 전 사 둔 바케트를 앙 물어뜯었다. '심플한' 런치박스가 나온댔는데, 그 심플함의 정도를 상상해보다가 1인 1 바케트를 장만한 나의 통찰이라니! 바게트를 주문할 때, 뭐하러 사냐고 했던 배태봉은 내 덕에 아사를 면했다. 도시락은 영영 나오지 않았다. 


오후 6시, 마침내 팍벵이 도착했다. 오늘 밤 머물 마을이다. 

내 오른쪽 자리(창가)에 앉아있던 할머니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Oh my God, I survived! 나 살아남았어! 

오늘 밤은 이 작은 마을에서 각자 보내고, 보트는 내일 아침 9시에 다시 출발한다고 했다. 선착장에는 삐끼들이 잔뜩 나와있고, 대부분 여행자들은 가격을 흥정하다가 그들을 따라갔다. 우리는 숙소를 이미 예약해두었다. 팍벵에 머물렀던 지인이 이곳 숙소들의 참혹함에 대해 열변을 토했기에, 또한 좋은 숙소에서만 볼 수 있는 메콩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기에,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은 미리 예약을 해야겠구나 싶었다. 슬로 보트로 국경을 넘기로 결정하자마자, 메콩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갈로를 서둘러 예약했다. 

팍벵에서 두 번째로 좋은(비싼) 숙소라는데, 그럼에도 예약 사이트에 전화번호 따위는 나와있지 않았다. 지도도 없고 무작정 감으로 걸어가다가, 번듯한 건물과 불빛이 보여서 저기 가서 물어보자 싶었는데, 거기가 우리 숙소였다. 선착장에서 오 분 남짓한 거리였다. 간단한 체크인을 마치고, 따뜻한 국물요리를 찾아 숙소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한밤중처럼 캄캄했고, 불빛이 거의 없었다. 혼자였다면 절망적이었을 어둠이었다.  

왼쪽이 들어갈 때, 오른쪽이 밥 먹으러 나올 때. 불과 10여분 만에 내려앉은 어둠. 

거의 유일하게, 따스한 불빛과 모여 앉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사바이디'라는 이름의, 가족이 운영하는 현지식 음식점이었다. 여행자들은 다 여기로 모여드는 듯, 곧 만석이 되었다. 사바이디 레스토랑은 정말 맛있고 정말 느렸다. 홀에는 온 가족이 동원되어 서빙을 도왔지만, 의사소통은 그중 어린 소녀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소녀의 미소가 정말 예뻤다. 매일같이 이 많은 관광객들 틈에서 미소가 사라질 법도 할 텐데, 수줍음이 배어있는 투명한 미소에 온종일 긴장 어렸던 마음이 풀어졌다. 아, 물론 음식 맛이 기똥차기도 했고. 오랜만에 들이킨 라오 비어도 좋았다. 마주 앉은 태봉은 똠양꿍에 연신 감탄했다. 태국에서 먹은 것보다 더 맛있다는 말에, 똠양꿍이 원래 라오 음식이라는 게 생각났다. 

음식이 전체적으로 순하다. 달고 짜고 기름진 태국 음식에 비해 자극적이지 않고, 들어가는 재료도 단순하다. 태국 음식도 너무 맛있지만, 매일 삼시세끼 먹기에는 이게 더 좋겠다 싶다. 태봉은 "음식도 사람을 닮아 순한가 봐" 이런다. 풍경도 그렇더라면서. 배에서 강변의 풍경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편하고 그리 좋을 수 없더란다. 그 비바람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다니, 놀랍다.  

태봉이 보면서 좋았다던 풍경이 대략 이러하다.


하지만.. 밤이 되니...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이렇게 춥다는 게 말이 돼?!!! 뻥뻥 뚫린 방갈로 창문으로 진격의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 들었다. 아까 맥주를 마시며, 오늘 밤에 영화나 한 편 보자 했는데. 영화고 나발이고, 리셉션에서 담요 하나 더 빌려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샤워는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온수가 안 나오길래 세수도 포기. 발만 닦고 어서 자자. 아침 햇살이 나면 따뜻하겠지. 훌륭하다는 메콩강 뷰는 내일 감상해보자.  


# 우리는 난민 보트에 올랐나 보오  


혹시나 아침이 되면 온수가 나올까 싶었지만, 여기 온수통은 전시용이 틀림없다. 결국 체크인할 때와 똑같은 꼬락서니로 체크아웃. 어제 하루 종일 비바람 맞으며 산발이 된 머리도 그대로. 옷차림은 신경 썼다. 가장 두꺼운 양말을 신고, 겨울의 한국을 떠나올 때 입었던 패딩점퍼를 꺼내 입고, 바지도 두 벌 껴입었다.  

멋지다는 뷰를 보러 발코니에 나갔지만, 10초 구경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아침을 먹으면 몸이 녹겠지. 아뿔싸, 숙소 레스토랑도 오픈 에어. 토스트 두 쪽과 싸구려 잼, 계란 프라이, 과일 한 접시가 나온 아침 식사는 총알같이 끝났다. 일기라도 쓰고 싶었지만, 미지근한 커피 온기로는 곱은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어제와 똑같이 참치 바게트와 참깨 과자, 물 한 통을 사들고 배에 올랐다.

9시 출발이라 했지만, 역시 슬로 보트답게 출발은 늦춰졌다. 폭풍이 오고 있다고! 어서 출발하란 말야!! 

한 시간이 훌쩍 지나, 마침내 배에 시동이 걸렸다. 배야, 배야, 부디 씽씽 달려다오. 너는 할 수 있어. 알고 있니? 너는 사실 스피드보트란다. 너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어서 루앙프라방까지 날아가자꾸나. 

오늘도 차갑고 끈적한 비바람에 얼굴 싸대기를 사정없이 맞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을 때쯤, 앞자리에 앉아있던 녀석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배 안을 둘러보니, 군데군데 빈자리들이 보였다. 이들은 대체 다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라진 이들의 자취를 추적하다 화장실 너머 배의 후미로 가보니... 이럴 수가!! 짐을 싣는 창고 같은 곳에 웬 난민들이 모여있다! 이불이며 옷가지며 온갖 천 쪼가리를 깔고, 덮고, 두르고 있는 이 부러운 광경은 대체 뭔가!! 이곳은 비도 들지 않는다!! 심지어, 창고 중앙 아래에 달린 배의 엔진에서 뜨끈뜨끈한 배기가스가 사정없이 뿜어져나오고 있다!!! 얼핏 보면 설국열차의 맨 뒷칸 꼬라지이지만, 이곳은 실로 천국! 지상낙원!! 그야말로 특등 칸 아닌가!!! 

매연을 콸콸 마음껏 마시며, 따뜻함을 누릴 수 있는 이곳. 나는 특등 칸에 반드시 탑승해야 한다는 의지로, 맨 구석의 짐들을 더더 구석으로 밀어붙인 뒤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았다. 나와, 내가 구원해 준 태봉이 이 특등 칸의 마지막 탑승자들이었다. 더 늦게 이 파라다이스를 찾아온 사람들은 부러움을 뚝뚝 흘리며 돌아갔다. 

그 후로는 평화롭게 시간이 흘렀다. 나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비어라오를 마시다가, 책을 읽다가, 졸다가, 밀린 일기를 쓰다가, 다시 졸기를 반복했다. 태봉은 포대자루에 등을 맡긴 채, 일관되게 졸았다.  


그리고 마침내, 루앙프라방에 입성했다. 

태봉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고 싶어 했던 도시이자, 내가 애틋함으로 기억하고 있는 도시.   

그 이름도 낭만적인 루앙프라방에, 이렇게 비와 함께 도착했다.   (계속)                  



+ 업데이트가 너무 늦었어요. 새로운 일들이 생기기도 했고, 글은 써도 써도 어렵습니다. 다음부터는 잊기 전에 기록해놓는다는 취지로, 가볍게 가볍게 쓱쓱. 생각 없이 쓰다보면 그게 또 글이 되겠죠? ㅎㅎ 일단 다음 편은 일주일을 넘기지 않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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