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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초 Jul 15. 2016

비와 루앙프라방

허니문을 가장한 하드코어 배낭여행(11)

1.

루앙프라방에 4년 만에 다시 왔다. 태국 국경을 넘어, 난민 보트에 올라, 2박 3일간 비바람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수도 없이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어. 루앙프라방에 도착하면 나아질 거야. 루앙프라방에 가면 따뜻할 거야. 루앙프라방 선착장에 도착하고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나의 바람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조마 베이커리 뒷골목 주변으로는 값싼 숙소가 밀집해있다. 예전에 묵었던 숙소를 찾아갔는데, 빈 방이 없다고 했다.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라, 삼십 분 넘게 골목 일대를 헤집고 다녀도 숙소를 구할 수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그나마 빈 방이 있는 곳은 너무 비싸거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우리가 원하는 방의 조건은 일단 저렴할 것, 답답하거나 눅눅하지 않을 것, 매트리스가 탄탄할 것, 밝을 것, 그리고 방에서 와이파이가 될 것. 고민하는 사이 날이 어둑해져 갔다. 배낭은 돌덩이 같고, 배도 고팠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곳에서 15만낍(20달러)에 방을 잡았다. 4년 전에 비하면 턱없이 비싼 가격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싼 가격에 속했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샤워를 했다. 오들오들 떨리던 몸에 따뜻한 물이 쏟아지고, 욕실 가득 뜨거운 김이 퍼졌다. 아 따뜻하다. 따뜻하다.

"아 행복해"

샤워를 마치고, 얼굴 가득 미소 지으며 나오는 나를 보더니 태봉이 껄껄 웃었다.

"응 진짜 행복해 보인다."

뜨거운 물로 샤워만 했을 뿐인데, 이토록 행복하다. 수건으로 젖은 리카락을 돌돌 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뜨거운 물도 한 컵 받아왔다. '차나 커피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싶던 찰나, 방콕에서 샀던 꽃차가 생각났다. 얼른 배낭을 뒤져 꽃 한 송이 꺼내 뜨거운 물에 띄워본다. 꽃잎이 사르르 풀어지고, 한 모금 들이키니 아아 행복하고 행복하다. 내 몸도 사르르 풀어진다. 내가 이 순간, 바랄 게 무언가. 세상 부러운 것도, 욕심나는 것도 없다. 그리고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아주 깊이.


2.

영혼의 강장제. 라오스에서의 시간은 자신만의 속도로 흐른다. 루앙프라방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진주빛 프랜지파니 꽃잎의 향기와 수준높은 아시아와 유럽의 매혹적인 풍미가 진하게 도시를 감싼다. 침묵 수행을 하는 맨발의 승려들, 빛나는 사원, 프랑스 제국 시대의 궁전과 저택, 그리고 다민족 거주자들로 인해 루앙프라방은 낭만적이면서도 느긋한 도시가 됐다. 메콩 강과 칸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이 오래된 왕가의 도시는 라오스에서도 으뜸가는 관광도시임에도 루앙프라방 고유의 색채를 유지하고 있다.
                                                                                                              - <론니플래닛> 라오스 편 중에서 -  


라오스에 처음 온 것은 2012년. '라오스에 가야지, 방비엥에 가서 라오 비어를 마실 거야. 라오스에 가야지, 이름도 근사한 루앙프라방에 갈 거야.' 몇 년이나 라오스 노래를 부르다가, 당시 나를 떡실신시켰던 프로젝트 하나를 끝내고 8박 9일간 휴가를 얻어 마침내 라오스에 왔다. 이미 십여 년 전에 여행자들의 마음을 홀딱 빼앗아갔던 풍경은 많이 사라졌겠지만, 라오스가 지닌 현재의 시간은 나에게 충분했다.    


그때 라오스에서 보낸 시간을 정리해보자면,

1일째 : 비엔티엔 도착. 저녁 먹고 시장 구경. 마사지
2일째 : 방비엥 이동. 저녁 먹고 맥주 마시고 마사지. 동네 한 바퀴 어슬렁
3일째 : 아침 산책. 강에서 튜빙. 동네 어슬렁어슬렁. 저녁 먹고 맥주 마시기
4일째 : 숙소에서 새벽 풍경 감상. 강가에서 휴식. 저녁 먹고 맥주 마시고 마사지
5일째 : 루앙프라방 이동. 저녁 먹고 맥주 마시고 야시장 구경
6일째 : 동네 어슬렁어슬렁. 푸산에서 일몰 구경. 저녁 먹고 새벽까지 맥주 마시기
7일째 : 새벽 탁발 구경. 쾅시 폭포 놀러 가기. 비엔티엔 이동
8일째 : 메콩강변에서 죽치기. 저녁 먹고 맥주 마시고 마사지

 


만나는 사람들이 내일의 계획은 뭐냐고 물으면, '그냥 어슬렁거리기'라고 대답했다. 투어 하나 하지 않았고, 막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하고,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 부담 없이 그냥 늘어지게 보냈다. 거의 매일 마사지를 받았고, 먹고 싶은 건 다 먹었다. 끼니때마다도 모자라, 틈만 나면 코코넛과 망고 쉐이크, 비어라오를 마셨다. 그래도 9일간 쓴 돈이 50만 원이 들지 않았다. 멋들어진, 알찬, 계획적인 여행은 전혀 아니었지만, 행복했다. 책을 몇 권은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 권도 채 못 읽었다. 8박 9일간 무엇을 했을까. 시간이 바람처럼 흘러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루하지 않고, 게으르게 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것이 내가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누린 자유였고, 라오스의 시간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산에 일몰을 보러 올라갔다가, 다른 사람들 다 내려가고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남아있던 몇 명의 여행자가 있었다. 그래서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중에 타오라는 친구는, 전날 야시장에서 저녁 먹을 때 옆 자리에서 인사했고, 길 가다 만났고, 푸산까지, 이틀새 세 번을 마주친 사이였다. 몇몇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새벽 네 시까지 맥주를 비우고, 서로의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이 밤이 저물지 않았으면, 싶었다.

 


여행을 마치던 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마지막 만찬. 즙이 풍부한 생선찜 요리. 비어라오 작은 병 하나. 좋아하는 음악. 셜록홈스 추리소설 한 권. 잘 보이지는 않지만 바로 옆의 메콩 강. 어쩌면 이런 순간. 나에게 이런 순간. 라오스에 와보길 오랫동안 원했다. 좀 더 일찍 왔으면 좋았겠지만, 더 많이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메콩 강, 남송 강에서의 튜빙, 푸시산에서의 일몰, 값싸고 맛있는 음식들, 비어라오, 자연, 휴식,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오랜만에 느껴본 배낭여행자의 빈 시간. 라오스가 나에게 준 것들에 감사한다. 큰일 났다. 마음 한 구석이 이렇게 쑥 빠져버려서 어이할꼬.



3.

간밤에 일찍 잠이 든 덕에, 새벽 4시 반에 일어났다. 폭풍이 온다더니, 비는 과연 맹렬히도 쏟아졌다. 할 일이 딱히 없었다.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기엔 불빛이 너무 어두웠고, 인터넷은 되지 않았다. 골목 내의 고만고만한 방들 중 이곳으로 결정한 건, 와이파이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방에서는 안 되고 숙소 건물 밖의 리셉션에서만 가능했다. 인터넷이 안 되니 좌불안석이 되었다. 방에서도 와이파이가 되는 곳으로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는 주룩주룩 내렸고 추웠다. 루앙프라방에 머무는 내내 그랬다. 난방이란 게 존재하지 않으니 추위를 피할 곳이 없었다. 이불 속도 추웠고, 사람이 모이는 카페도 추웠고, 따뜻한 스프도 추운 곳에서 먹으니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름에도 손발이 차가운 나는, 예상치 못한 추위에 손발이 얼어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급기야 라오스에서 털장갑과 털양말을 찾아 골목골목을 헤매었고, 사흘째 성공했다. 태봉은 두툼한 겉옷을 새로 장만했다.


하릴없이 무료한 날들이었다. 영화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지만, 어디든 영화 한 편을 다운로드 할 만큼의 인터넷 환경을 제공해주진 않았다. 숙소를 나갈 때 다운로드를 걸어놓고 나가도 돌아오면 2, 3% 진행되어 있었다. 영화를 상영해준다는 카페에 가기도 하고, 간간히 비가 그칠 때면 옆 마을까지 걸어가 보고,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지만, 남편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즈음, 그에게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는 단 하나의 장소를 말했다. 그곳이 루앙프라방이었다. 그의 말 때문에 라오스에 왔다. 나 역시 루앙프라방이라면 얼마든지 다시 가봐도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푸시산에서의 일몰을, 사랑하는 그와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뭐람. 어마어마하게 오른 물가, 한국인이 절반인 거리, 춥고 우울한 날씨. 이렇게 루앙프라방을 보내야 하나.   



4.

나흘째, 비가 멈췄다. 마침내 푸산에 오르기로 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 루앙프라방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정상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마을 위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루앙프라방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던 단 하나의 장면, 푸시산에서의 일몰. 태봉은 한참을 말없이, 저물어가는 루앙프라방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자리를 뜨고, 주위가 캄캄해질 때까지 나도 가만히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루앙프라방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잠시라도 갖기를 바라면서.


나 또한, 이 풍경 하나에 루앙프라방에 서운했던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 변해버린 루앙프라방 중 변치 않은 모습들이 남아있고, 이 석양만으로도 루앙프라방은 충분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지되어 있는 듯한 묘한 느낌과 부드러운 색채의 대비. 그렇다, 루앙프라방에는 고유의 색채가 있다. 자신만의 속도로 흐르던 라오스의 시간이 이제는 위태롭게 흐르고 느긋함이 사라진 듯 보여도, 라오스는 여전히 라오스에 있구나.

 

그때의 루앙프라방
오늘의 루앙프라방


"내 인생 중 최고의 일몰이었어."

산을 내려오며 태봉이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같은 추억을 나누어 갖게 되었구나. 그리고 우리, 앞으로 더 멋진, 더더욱 멋진, 더더 더욱 멋진 일몰도 함께 하자. 여전히 남아있을 인생의 최고, 선물 같은 장면을 찾아서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손 잡고 길을 떠나보자. 벌써 장거리 이동에 허리도 아프고, 배낭 메고 걸으면 금세 힘들어지는 나이가 되어버렸지만. 음.. 그때쯤이면 좀 더 가볍게 짐을 쌀 수 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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