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Facilitator
나는 지금까지 회사를 제법 자주 옮겨 다녔다. 18년째 직장 생활 중 지금 회사가 6번째 회사다. 그중 P사에서보낸 7년의 경험은 많은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가장 큰 부분은 Facilitation을 배우고 이를 적용해 성과를 만들어낸 일이다.
2014년의 끝자락으로 기억한다. 팀 동료 2명이 facilitation 교육을 받고 왔다. 팀 내에서 배운 내용을 공유해 주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나는 그냥 가슴이 뛰었다.
'아... 이걸까? 이걸로는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케팅을 그만두고 교육부서에 온 이후, 나는 나의 직장생활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업계에서 교육부서에 대한 비전이나 중요도는 그리 크지 않았다. 결국은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로 가든가, 독립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관점에서 과연 기업교육의 어느 분야를 내 분야로 할 것인지 찾아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facilitation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왔다. 참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배워서 아는 것과 실무에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그 어려움은 어쨌든 한 번은 넘어야 할 가파른 산이다. 조금씩 조금씩 적용해 나가며 기회를 노리던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두 번의 전환점이 있었다.
한 사업부에서 조직을 재정비하는 일이 있었다. 재정비를 한 만큼 빠른 직원 교육을 요청했는데 당시 그 사업부를 담당하는 트레이너는 휴직 중이었다. 다른 담당자가 대신 준비하고 교육을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업부는 너무 급하게 교육을 진행을 요청했다. 대체 담당자가 교육을 준비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팀장님과 담당자 사이에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갈등이 심해졌다.
"그러면 제가 해 보겠습니다."
나는 변화를 좋아한다. 당시 회사의 상황을 보았을 때, 트레이너가 열심히 공부해서 그 지식을 직원들에게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앞으로 다가올 많은 교육 요구들을 담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해결책으로 facilitation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사업부의 요구사항을 충족시켜 주면 됩니다. 다만 제가 공부해서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신 유관 부서들을 그 자리에 불러주세요. 그러면 만들어 보겠습니다."
배웠던 모든 지식과 미미했던 경험을 총 동원해서 facilitation으로 해결을 시도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잘 마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공부해서 가르치는 교육 방법에서 벗어나 이슈해결을 위해 구성원들의 지식과 경험을 모으고 결론을 함께 내리는 연결과 학습의 시작이었다.
Facilitation 공부에 더 매진했다. 그러던 중 두 번째 기회가 왔다. 이 사건으로 나는 내 경력에 가속기를 세게 밟게 된다.
"팀을 새롭게 개편했습니다. 팀이 한 목표를 볼 수 있도록 Vision workshop을 하고 싶어요. 트레이닝 부서에서 도움을 주었으면 합니다."
사업부에서 이 요청을 했을 때에는, 어디 외부 업체를 소개해 주거나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정도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나와 미팅을 몇 번 하는 중에 나에게 진행해 줄 것을 요청했고, 나는 열심을 다해 준비했다. 그때가 30대 후반이었는데, 참 겁이 없었다. 사실 나도 비전워크숍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나 자신 있게 질렀는지, 사업부의 모든 매니저 분들의 기대가 정말 컸다. 50여 명의 인원을 대상으로 제주도에서 faciliation 초보가 대담하게 진행한 5시간의 워크숍은 성황리에 마쳤고, 그 일로 교육부서 내에서, 그리고 그 사업부에서 나의 인지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졌다. 그 때 너무 잘 나갔다. 걱정되는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었다. 직장인에게는 두 가지 파워가 있다. 포지션 파워와 영향력 파워인데, 내 포지션은 바뀌지 않았지만 영향력은 포지션을 멀찌감치 뛰어넘었다.
선순환이 일어났다. 트레이너로서의 인생을 facilitation에 한번 걸어보리라 마음먹고 배움과 실습을 지속해 나갔다. 2016년, IAF(International Association of Facilitators)에서 주관하는 CPF (Certificed Professional Facilitator) 시험에 응시했다. 시험은 싱가포르에서 치렀다. 아내의 친척이 싱가포르에 있어서 아내와 아이를 친척집에 놓고 시험 하루 전, 홀로 호텔을 갔다.
"자기야. 우리 여행에는 2가지 plan이 있어. 내가 붙는 게 A plan이야. 붙으면 같이 여행할 거야. 떨어지면 B plan이야. 나는 마음을 다스릴게 자기는 아이랑 둘이 여행을 해."
비장한 각오로 시험장에 갔다. 총 6명의 응시자가 하루종일 시험을 치른다. 1차 면접. 시연. 2차 면접.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합격여부 발표. 낯선 환경, 언어, 6명 중 6번으로 배치된 순서 모두가 나를 극도로 긴장시켰다. 많이 긴장한 덕분인지 나는 성공적으로 시험을 치렀고, 시연 시에는 참여자들 사이에서 박수가 흘러나왔다. 자랑이지만, 나만 박수를 받았다. 준비한 모든 것을 정말 깔끔하게 수행했다. 당연히 합격!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 집으로 갔다.
"A plan! A plan! 나 합격했어! 이제부터 즐기자!"
합격의 기쁨을 전하는 순간, 아내는 나에게 놀라운 선물을 줬다.
"오빠, 나 둘째 임신했어."
그렇게 감격스러운 순간이 인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지금 나는 모 회사의 아시아 지역 상업부 교육담당자로 홍콩에 있다. 교육에 대한 나의 열정과 2016년 취득했던 CPF 자격이 실제로 나를 여기까지 이끄는데 정말 큰 역할을 했다. 중간에 다른 업무를 하는 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교육으로 돌아왔다.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자랑스러웠던 순간으로 글쓰기를 하려니 또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커리어가 아닌 인생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한 일, 특히 반대를 지혜롭게 이겨내고 결혼한 것이 제일 잘한 일이다.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자연주의 출산으로 두 아이를 가진 일, 제대 후 해외로 무작정 훌쩍 떠났던 경험, 대학원 석사 졸업 후 바로 취직을 한 일, 마케팅을 과감히 그만두고 좋아하는 일을 찾았던 일 등이 떠오른다. 여러 장면들이 떠오른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한편, 그때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참 잘한 결정이었다 싶은 일들도 떠오른다. 무모했던 젊은 시절의 어리석음과 아쉬운 일들도 물론 떠오른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홍콩에 가신 선택을 후회하시나요?"
코칭을 받던 중 들은 질문이다. 딱 잘라서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잘한 선택이었다고 지체 없이 답했다. 나중에 돌아보면 반드시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홍콩생활 초반 적응의 어려움들이 현재에도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 그 때의 잘 못된 포지션이 계속 괴롭히기도 하고 다소 주눅이 들기도 한다. P사에서의 나의 찬란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그 차이는 너무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해야할 행동은 변하지 않는다.
"어려움은 직시하면 그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최종병기 활'의 주인공이 목숨을 건 마지막 화살을 날릴 때 나오는 대사다. 그래. 다시 일어나 직면하자. 져서 무릎꿇더라도 피하지는 말자. 직시하면 그뿐! 어디에나 길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