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개별성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김 차장의 #퍼실리테이션 적용기 3

by Passion fruit

당신이 옳다 (정혜신, 해냄)을 읽고


“자기 존재가 주목받고 집중받는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 비로소 합리적 사고가 가능하다.” (45p)


몇 년 전 중소기업 인턴들을 대상으로 2일간 강사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그들에게 직장생활을 준비할 수 있도록 자기 이해와 조직의 이해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했다. 내가 담당한 과정 마지막에 한 청년이 소감으로 적어낸 한마디가 나를 뭉클하게 했다.


‘자존감이 올라갔습니다.’

이름을 적어낸 것은 아니지만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그곳에 모인 청년들은 대기업에 갈만한 스펙을 갖추지 못했다. 일류대학 졸업생도 아니고 고졸도 많았다. 당시 시기로 봐서는 취업의 문턱에서 여러 번의 쓴 좌절도 격었으리라. 주변에서 그리 주목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처음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느껴졌던 무거운 공기가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틀간의 과정 동안 인턴들은 좀 더 말하고, 좀 더 활동적이고, 좀 더 웃게 되었다. 내성적으로 보였던 그 청년은 가장 앞자리에 있었는데, 조를 대표하여 기록도 하고 발표도 했다. 처음에는 ‘내가 해도 될까요?’라는 분위기가 시간이 갈수록 ‘제가 하겠습니다’의 분위기로 바뀌며 점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기록과 발표는 나에게 지지받고 또 모두에게 지지받았다. 본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느꼈음이 틀림없다.


퍼실리테이터는 중립을 지킨다. 참여자 중 특정 사람, 또는 특정 의견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누구에게 발언의 기회를 더 주거나, 누구의 말에 특별히 더 귀 기울여 주지도 않는다. 퍼실리테이터는 모든 의견을 지지하고 반영한다. 그리고 참여자들의 이해가 더 필요한 경우 질문을 통해 잘 이해될 수 있도록 돕는다. 모두를 똑같이 대하지만 동시에 모두를 개별적으로 대한다.

워크숍이 잘 되었을 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대여섯 시간의 논의를 했음에도 얼굴이 밝고, 시끄럽고 활력이 넘친다. 희열과 해방감을 느낀다. 특별히 더 대우해준 것도 없는데 왜 그럴까? 누구보다 더 대우해준 것은 없지만,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대우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별적 존재로 대우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이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개별적 존재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할 말을 하지 못했고,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억눌리고 쌓여가지만, 마땅히 풀 길이 없어 술자리에서 푸념하는 것이 대한민국 직장인의 일상이다.

정혜신 씨는 공감과 감정노동을 구분한다. 진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공감하는 척을 하는 것은 노동이다. 노동은 피로감을 일으킨다. 참다 참다 어느 날 터진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알아야 한다. 모르는데 어떻게 공감을 하느냐는 것이 정혜신 씨의 주장이다.

사내 강사로서 empathy와 sympathy를 구분하며 공감을 다루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공감을 잘할 줄 모른다. 공감이 정말 어렵다. 구글링을 해보고 동영상을 봐도 머리로만 이해될 뿐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이 옳다’의 이 장을 읽으며 깨달았다. 핵심은 대상을 개별적 존재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왜 대상을 개별적 존재로 보기가 어려울까? 우리는 어느새 개인을 집단적 존재로 인식하는 데 길들었다. 노인들이란, 구세대란, 여자들이란, 요즘 애들이란 등등 쉽게 구분하고 판단한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영업부 사람들이란, 인사부란, 재무부란, 상사들이란, 부하직원들이란 이라는 그룹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라벨을 붙여 놓는다. 그리고 마치 그런 사람들은 그러니까 이런 거야 라며 자신의 식견(?)을 자랑한다. 사실 그 속에는 ‘내가 그들을 이미 잘 알아’라는 오만함이 깔려있다. 그리고 그 오만함은 한 사람을 대할 때에도 ‘내가 당신을 이미 알아’라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런 사람들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말이 꼰대다. 비폭력 대화에서는 비판과 판단에 근거한 대화를 폭력적 대화라고 한다.) 내가 이미 아는데 무엇이 궁금하겠는가? 질문과 경청보다는 훈계와 조언이 앞선다. 공감은 고사하고 이해의 근처에 가기도 어렵다.


크리스 아지리스 교수(Chris Argyris 1923~2013, Professor Emeritus at Harvard Business School)는 추론의 사다리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추론의 과정을 개념화하였는데 대략적인 과정은 이렇다. 사람은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정보(data)로부터 나름의 기준으로 의미(meanings) 있는 정보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한 정보에 의해 결론(conclusions)을 내리고 행동(actions)한다. 그리고 그때 내리는 결론은 믿음(belief)과 결부된다. 즉, 결론들이 모이면 세계와 대상에 대한 어떤 믿음이나 신념을 형성하는데 이는 편견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형성된 믿음이나 편견은 이후 정보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준다. 내가 인지한 정보 중 믿는 바에 부합한 정보만을 선택한다. 쉽게 말하면 좋아하는 사람은 뭘 해도 좋은 면만 보이고, 미워하는 사람은 뭘 해도 미운 면만 눈에 띈다. 추론의 사다리는 추론의 과정을 돌이켜 보며 더 나은 판단과 행동을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시작은 나의 믿음이나 편견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이런 편견을 인식하고 제거하는 것이 대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바탕이고 개별적 존재로 볼 수 있게 하는 시작점이다.


“팀 내에서 구성원들 간의 사적인 얘기가 얼마나 이루어지는 가는 팀의 분위기를 볼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한 컨설팅 회사 대표님의 말이다. 회사생활을 돌이켜 보면 친한 동료들과는 서슴없이 개인사를 털어놓곤 한다. 가족끼리 따로 만나기도 하고 휴일에도 편하게 연락한다. 그러다 보면 그 동료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내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반대로 사이가 좋지 않거나 잘 모르는 직원과 사적인 얘기를 하지는 않는다. 회사에서 하는 대화 대부분은 당연히 업무다. 하지만 그 사람의 뒤에는 아내와 남편, 자식들과 부모님이 있다. 그 사람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고, 세상 어떤 존재보다도 크고 믿음직한 누군가의 아빠고 엄마다. 까다로운 고객 만나기를 마다하지 않고, 때로 밤낮없이 일하고, 어렵고 힘들어도 참아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회사에서 보이는 모습만으로, 직위나 성과만으로는 그 사람을 존재로 볼 수가 없다. 존재로 대우받지 못한 숱한 대한민국의 회사원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기계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존재로 대우받은 사람은 마음의 안정감을 확보한다. '마음의 안정감은 합리적 사고를 가능하게 합니다.'라는 정혜신 씨의 말은 회사생활을 하는 우리가 새겨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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