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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ssion fruit Dec 19. 2024

한국 방문 중

아이들 방학이다. 홍콩 국제학교는 새 학기가 9월에 시작해서 6월에 끝난다. 7월~8월은 긴 여름방학이 있고 겨울방학은 약 3주 정도로 짧다. 우리 가족은 보통 여름에는 홍콩 주변에 있는 나라로 일주일 정도 여행을 갔었고, 주로 겨울 방학 때 2주~3주 정도 한국에 온다.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은 손주들을 볼 수 있는 겨울을 매년 손꼽아 기다리신다. 올해도, 겨울방학을 하자마자 지체 없이 한국으로 왔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마음상태인 것 같다. 퇴직을 3개월 앞두고 있는데, 부모님과 처가 식구들에게 말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다. 말하는 순간 아이들도 불안해할 것이고 모든 대화의 주제가 나의 퇴직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부모님들에게도 알리지는 않고 이번 한국 방문을 하고 있다. 이번 한국행 티켓은 4개월 전에 이미 예약을 해 두었었다. 사정이 있어도 일정을 바꾸거나 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 오면 할 일들이 많다. 나야 출장으로 한국을 자주 왔었지만, 아이들과 아내는 1년에 딱 한번 오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사람, 먹고 싶은 것이 많다. 아내는 몇 주 전부터 음식 목록을 만든다. 아이들은 키자니아와 명동을 가자고 조른다. 이번 방문에서는 추가적으로 할 일들이 몇 가지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친척분들을 찾아뵙기로 했다. 부산에 있는 동서네 가족도 만나기로 했다. 17일 정도의 일정인데 제법 빡빡하다. 그냥 쉬는 시간도 필요하기에 이일 정도는 일정을 비워두었다. 


작년에는 3주간 한국에 머물렀었는데, 작년 방문 이후 2주 정도만 머물기로 아내와 약속을 했었다. 아무리 본가와 처가가 편하다고 해도 떠돌이처럼 이곳저곳 오가다 보면 사실 많이 지친다. 대부분의 일정은 아이들 중심으로 짜고 다니고,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일정이 쉽지 않다. 잠자리가 편하지 않아 잠도 잘 자지 못하고, 또 일상이 무너지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이 힘들다. 




처가댁은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이번에도 한국에 오자마자 처가댁으로 와 짐을 풀었다.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장인, 장모님과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내 지난번 출장 때에는 한국에 비상계엄령이 발효되었다가 해제되었었다. 이번 가족과 귀국한 날에는 탄핵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올 때마다 특별한 일이 있다며 대화를 이어나간다.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지만, 마음 한편에는 부담이 있다.


오랜만에 한 방에서 네 식구가 잠을 잔다. 

나는 바에 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위해 줄을 서 있다. 앞에 있는 한 여자 손님이 지갑을 떨어뜨렸다. 떨어뜨린 줄 모르고 가는 앞사람에게 친절히 지갑을 주워다 주었다. 나를 돌아보는 여자 손님은 빨갛게 머리를 염색하고 양갈래로 땋았었는데,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다소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나는 전혀 건드린 물건이 없다며 지갑을 돌려주었다. 바 안에는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바 가장 앞자리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드럼 앞에 앉아있었다. 보이는 직원이 그 사람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맥주 한 잔을 시켰는데 그 직원이 상당히 불쾌한 듯이 나를 쳐다봤다. 바 뒤편에서 허겁지겁 한 직원이 손님들 사이를 비 짚고 다가와 나에게 말한다. 저 직원은 유명한 드럼연주자여서 주문을 하는 것은 상당히 큰 실례라며 자기에게 주문하라고 했다. 다시 주문을 하고, 곧 맥주를 받았다.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뒤쪽 한 테이블에 자리가 비어있는 곳을 향했다. 어차피 빈 테이블은 없었고, 합석을 해야 했다. 자리에 앉았다. 서너 명 정도의 다른 손님들이 있었다. 한 명씩 소개를 시작한다. 곧이어 내 차례가 왔다. 


'저는......'  


소개를 하려는데 누군가 머리를 후려치는 듯 큰 목소리가 뇌에서 울렸다. 


"너는 곧 퇴직당하잖아!"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안. 옆으로 아들이, 딸이 그리고 아내가 곤히 잠을 자고 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바를 가본 기억도 까마득한데, 바를 간 것도, 술을 시킨 것도 너무 생소한 꿈이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예비 실업자'라는 낙인이 몸 어디엔가 새겨진 듯하다. 




오해는 하지 않으시기 바란다. 하루하루를 마음을 졸이며 낙담해서 불안해하며 지내지는 않는다. 여전히 잘 먹고, 잘 웃고, 농담도 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지낸다. 더욱이 일 년에 한 번 오는 가족들의 한국 방문을 망칠 생각은 없다. 더 즐겁고 더 소중하게 보내야 한다. 그런데 이제는 이게 어느 정도 일상이 되었다. 긍정과 부정, 불안과 기대, 낙담과 의욕이 엃히고 설켜서 가끔씩 한 줄기가 툭툭 튀어나오곤 한다. 의식으로는 긍정을, 기대를, 의욕을 더 많이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이렇게 꿈에서, 또는 때때로 이유 없이 튀어나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쩔 수 없이 겪는다. 나보다 먼저 회사를 나갔던 전 동료가 2달 정도 일을 구하지 못하니 조급해지더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 본다. 어찌하랴, 어차리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아이들은 한국에 와서 정말로 즐거워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홍콩에서는 볼 수 없는 대형 키즈카페도 가고, 홍콩에는 없는 스키를 타고,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는다. 요 며칠, 한국의 하늘은 참 파랗고 맑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이라도 이력서를 한 번 더 꺼내서 검토해야 할까? 링크드인 프로파일을 다듬어야 할까? 구직검색을 더 해야 할까?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미리미리 해야 할까? 그런다고 무언가 크게 달라질 것이 있을까? 이렇게 브런치 글을 쓰는 건 무슨 소용일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가족을 위한 시간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하자. 이력서와 프로파일은 못 채우지만, 마음에 사랑과 에너지를 채우자.


Go with the f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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