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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Nov 06. 2021

피카소의 동전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이 벌써 세번째다. 전화를 받는 친구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왜 또? 아직도 못 찾았어?"

대충 들어봐도 어떤 상황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이들 돌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의 남편이 쩔쩔 매는 모양이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오랜만에 독박육아에서 해방되었다며 잔뜩 상기되어 있던 친구였는데 얼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자기는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평소에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그걸 아직도 몰라? 애는 나 혼자 키워?"

친구내외 사이에 다소 감정이 섞인 말들이 오갔고 옆에서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가정이 있는 친구를 괜히 밖으로 불러내지는 않았나 하는 죄책감에 괴로웠다. 통화를 마친 친구는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설움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불현듯 닭살 돋는 멘트로 온갖 애정행각을 벌이던 그녀의 연애시절이 떠오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친구가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아도 결혼생활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이렇다 할 조언을 해주지 못해 참 안타깝다. 아니, 조언까지도 필요없다. 공감이라도 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머,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래!"라며 신랑 흉이라도 함께 실컷 보면 친구의 스트레스가 풀릴텐데 말이다. 그저 들어주는게 전부라 미안하다. 이럴 때는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너무 속상하다. 친구는 한참을 대나무숲에서 이야기하듯이 신세한탄을 하더니 마침내 모든 넋두리가 싱글예찬으로 귀결되었다. 

"내가 이럴줄 알았으면 결혼을 안했어. 너는 결혼 안해서 너무 좋겠다. 니가 부러워."

물론 그 모든 말들이 다 진심일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사와 육아에 지쳐서 하는 말이지 그녀의 결혼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행이었을리 없다. 따뜻하고 아늑한 시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주위에 결혼한 친구들은 대부분 이렇게 얘기한다. 

"혼자라서 외로우면 그러려니 하지. 짝이 있는데도 외로우면 답이 없어. 둘인데도 내 마음은 공허하다니까."

한편 싱글들이 갖는 시간적 여유도 흠모한다. '내가 싱글이라면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를 늘상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특히 '친정 부모님과 많은 추억 만들기'가 꼭 있다. 결혼 전에 충분한 시간을 함께 하지 않았음을 두고두고 아쉬워하면서 지금은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그런데 정작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은 그런 특권을 누릴 줄 모른다. 결혼하라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 부모님과 마주치는 일을 불편해한다.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에는 '애인이 생기면'이라는 단서 조항이 있다. 혼자서 하면 왠지 모르게 처량 맞아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 직장에서 모시던 상사가 혼기가 훌쩍 넘은 분이었는데 내가 혼자서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셨다. 그 뿐 아니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급격히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예민하게 반응하시곤 하였다.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도 여자로서 사랑받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시면서 이번 생은 망했다고 자조하셨다. 자신의 인생이 풀리지 않는 모든 이유가 결혼을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상대적 박탈감과 패배감에 젖어있는 그분에게 누구도 선뜻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을 끊임없이 기웃거리며 소중한 현재를 놓친다. 미련하게도 담장 너머 이웃의 잡초를 구경하느라 나의 정원에 핀 작은 꽃 한송이를 돌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원하는대로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들어서면 행복할까? 문득 학창시절 즐겨보던 추억의 TV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밤에의 '인생극장'을 소환해본다. 매주 인생의 갈림길에서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어떻게 삶이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빠밤 빠 빠밤 빠 빠밤 빠 빰빠라빰~~배경음악이 나오면서 주인공이 주먹을 불끈 쥐며 "그래, 결심했어!"라고 외친다. 돌이켜보면 재미 위주의 예능인데도 그 안에 인생철학이 모두 담겨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순탄한 결과는 없었다. 나름의 문제가 항상 존재했고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선택은 시험받게 마련이었다. 


피카소는 선택의 기로에서 동전던지기를 했다고 한다. 동전으로 결정된 선택은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져 대중들 사이에 '피카소의 동전'이 입소문이 났다. 피카소의 동전에 불가사의한 효험이 있다는 루머에 반해 피카소는 이렇게 담담히 말했다. 

"앞면과 뒷면. 일단 동전던지기로 결정했으면 그 길이 옳은 선택이 되도록 저는 최선을 다합니다. 어느 면이 나오더라도 만족하도록 말이죠." 

결국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능력, 행복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피카소는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보다도 행복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피카소를 닮고 싶다. 아직 인생의 동반자를 찾지 못했으나 지금 이대로도 행복하겠다. 언제가 내게 사랑이 찾아온다면 나는 그런대로 또 행복한 사람이기를 바란다. 혼자라서 느끼는 삶의 무게에 사로잡힌 나머지 선물같은 오늘 하루를 그냥 흘려버리지 않기를. 미풍에도 딸랑딸랑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절 처마 끝 풍경처럼 나의 행복지수가 일상의 작은 변화들에도 섬세하게 반응했으면 좋겠다. 결혼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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