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평범해서 특별한 오늘

by 지소영

오후 세시. 사무실을 가득 메우던 통화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동료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 시간. 30분 남짓이지만 분주한 일상에 쉼표 하나를 두는 건 생각보다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따끔 특별한 사정으로 30분을 누리지 못하는 날에는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는 것처럼 하루가 무겁다. 이쯤에서 휴식을 취하면 퇴근시간까지 시계침이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한창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그새 밀린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는데 동료 한명이 불현듯 탄식을 내뱉는다. "아~~~~나 너무 마음 아팠어요!" 어쩐 일인지 눈물까지 글썽이는게 아닌가. 모두가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는데 눈치 빠른 몇몇은 감을 잡고 "맞아. 나도 아까 그 얘기 들었어요. 너무 안됐더라."고 맞장구를 치는 거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궁금한건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내가 제일 먼저 다그친다. "뭔데요? 무슨일인데요?"


동료는 기존 후원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후원금 증액을 권유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전화를 받은 건 후원자님의 어머님이었다고 한다. 아들을 찾는 용건을 물어보시길래 대략적으로 설명드렸댄다. "우리 아들이 그런 좋은 일을 하고 있었던 가요?" 어머님은 아들이 후원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셨던 모양이다.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다고 칭찬을 하며 언제쯤 후원자님과 직접 통화할 수 있으련지 여쭤보니 그제서야 어머님은 떨리는 음성으로 힘겹게 말씀하셨다. "어쩌지요?..사실..우리 아들이 죽었어요."


예상치 못한 전개에 숨이 달아났다. 영겁의 시간이 지난다하더라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사실과 또 마주하게 될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본인 입으로 그 말을 한다는 것이 고역이었을 것이다. 모원단장(母猿斷腸).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잃고 창자가 끊어졌다 하여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비통함을 형용한다. 나는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할 슬픔이다. 차마 죽은 아들의 휴대전화를 해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머님은 아들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셨다.후원을 유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들의 뜻을 이어가고 싶다며 증액을 결정하셨다는 것이 동료에게 전해들은 내용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그리워하는 애끓는 모정이 진한 여운을 남겼다. 온종일 먹먹함이 가시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오늘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우리에게 아직은 많은 날들이 남아있을거라 여기지만 이별이 언제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지는 부모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여지껏 받기만 하고 뭐 하나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했다. 특히, 지난 3년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삶의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했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잔뜩 화가 나 있었던 거 같다.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고 그렇다고 뭐 하나 진득하게 꾸준히 밀어붙이는 근성도 없었으니까. 호기심에 반짝 타오르다가 금방 심드렁해지는 내가 못마땅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내가 서 있을 자리를 점점 잃어갔다.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었다. 어둡고 깜깜한 동굴에 갇혀 나조차도 나를 외면했을 때 지치지도 않고 매순간 나를 찾아나서는 이는 부모님이었다. 그 분들은 내게 왜 그것밖에 하지 못하냐고 몰아세우는 법이 없었다. 내 존재의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셨다. 끝없이 넓고 깊은 사랑이 나의 온 몸을 덮쳐서야 나는 스스로에게 휘두르던 가혹한 채찍질을 멈췄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비로소 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배우는 과정에서 두 분의 마음을 참 많이도 주름지게 만들었다. 내 걱정에 잠을 설치셨을 수많은 밤들이 떠오른다. 힘들어할때마다 내 등을 가만히 쓸어주는 손길과 애틋한 눈빛도 기억난다.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하니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뒤흔들었다. 보고 싶다. 보고싶다라는 네 글자에 온전히 담을 수 없을만큼. 지금 당장 달려가 와락 품에 안겨서 볼을 부비며 체온을 확인하고 싶다. 다급하게 휴대전화를 움켜쥐고 부모님과의 채팅방을 찾았다.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많은데 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다. 어떤 말도 충분하지 않을 거 같다. 고르고 골라 끄집어 낸 말이 겨우 "아빠 엄마!"였다. 단숨에 "응! 이쁜 딸, 왜?"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나는 부모님이 손 내밀면 닿는 곳에 계시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묻는다. "아참, 내가 얘기 했던가요?" "뭘?" 영문을 모르는 두 분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해한다.

사랑한다고

싱거운 나의 고백에 채팅방은 이내 온갖 이모티콘으로 휘황찬란하다. 웃음꽃이 만발한다.

먼 훗날 지금 이 순간이 아리도록 그리울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하루가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 그 반짝반짝 빛나는 장면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할 것이다. 슬프도록 찬란하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마침내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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