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소설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을 느끼다
저번 주말에 성수에 위치한 하루키 팝업스토어를 들렀다. 아무리 팝업이 넘쳐나는 성수라지만, 우리나라 작가도 아닌 일본 작가의 팝업 스토어라니.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것을 일찍이부터 알고 있었지만, 토요일 12시 스토어 앞에 질서 정연하게 한 줄로 기다리는 사람들을 뒤에 한자리를 차지하며 다시 한번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시간이 적당히 흐른 뒤에 팝업 스토어에 들어갔고,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를 구매하였다. 아마 '하루키의 책은 우선 사고 봐야지'라는 불가항력이 작동했으리라.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한 3초 정도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답을 하곤 한다.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그 이름이기 때문에 개성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나에게 떠오르는 이름은 하루키뿐이다.
고등학교 1학년쯤이었을까, 1Q84를 통해 하루키의 책을 처음 접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많이 희미해졌지만, 그 당시 조지 오웰의 1984를 아주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 학교에서 읽으라고 해서였을 것이다.) 뭔가 그와 비슷한 결이겠지 하면서 이 책을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건 도대체 뭔 책이야? 왜 책 제목이 이래?'라는 호기심도 아마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여러 기억이 선명하게 존재하는 시점부터 (나는 이것을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믿고 있다.) 나에게 책은 언제나 타의로 읽히는 대상이었다. 물론 그 타의의 주체는 학교, 논술학원, 집 등이 있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타의로 읽는 책은 나에게 그리 큰 흥미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희한한 제목에 이끌려 태어나 처음으로 내 의지에 의해 1Q84를 구매하게 된다. 사실 기억이 너무 희미해서 이게 처음인지 다섯 번째인지 기억은 안 난다. 하지만 처음이라고 믿고 있다.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처음 읽어봤는데,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데까지 사흘도 채 걸리지 않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필력에 감탄하며, 그가 묘사하는 그곳을 머릿속으로 계속 그려나갔다. 상상력이 총동원되는 순간이었으며, 소설이 줄 수 있는 재미를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는 자의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아마 1Q84를 덮은 그 순간이 나에겐 계몽이었으리라. 특히 서점에 하루키의 신작이 출간되면 그냥 어디에 홀린 사람처럼 무조건적으로 구매했다. 하루키 책은 내 아가페였다.
하지만, 그 어떤 책도 나에게는 1Q84만큼의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첫사랑과 첫 키스가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하지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를 읽으며 오랜만에 첫사랑과 재회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책을 읽을수록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는 점점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 주인공이 실재하는 곳이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나조차도 헷갈리기 시작할 때, 그제야 비로소 10년 전 1Q84에서 느꼈던 하루키식 마법에 다시 한번 빠져들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 (하루키는 작가의 말을 잘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 역시도 하루키가 매 번 모티프로 사용하는 현실과 판타지 세계를 전혀 다른 형태로 소비하고 있었던 듯하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를 읽으며 정말 오랜만에 소설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시곗바늘이 없는 시계탑이 서있는 도시에 내가 들어간 것처럼, 현실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을 소설에 맡길 수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하루키가 묘사하는 등장인물과 도시를 마음껏 상상하여 그려낼 수 있었다. 책을 읽은 지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머릿속에는 형태가 변하는 벽과 오래된 꿈들이 모여있는 도서관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처럼 하루키의 소설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매번 어떤 현상과 인물의 감정을 얘기할 때 ~하는 것처럼 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시각화를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약간은 희미했던 모자이크 된 부분이 비유를 통해 더욱 선명해지며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재미나게 놀다가 엄마가 창문 밖으로 '밥 먹을 시간이니 들어와라'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 시절에는 엄마가 소리치기 전까지 나의 시간은 영원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시계와 달력을 보는 일이 점점 잦아진다. '내일까지 프로젝트 기획서를 마무리해야 해.' '몇 시간 뒤면 나의 여행은 끝나.' 시간의 흐름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공간은 오로지 나의 꿈속에서 일 뿐이다. 나만의 도시가 세워지는 바로 그곳. 그래서 이 소설에서도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도시의 꿈 읽는 자로 적합했던 것이 아닐까? 시간이 중요한 현재 세계보다 시간이 영원한 도시가 그 소년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이 커피숍의 여인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가 현실 세계에 살아갈 이유가, 의미가 생겼기 때문에 그는 비로소 그 도시를 떠나 그림자와 결합하여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게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머리 위에 접시를 얹고 있을 때,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거야.' 책을 읽는 초반에 현실 세계와 불확실한 벽으로 세워진 도시는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을 쳐다보면 머리에 얹고 있는 접시가 깨지기 때문에. 하지만 내 육체는 현실 세계에 있을 수 있고 그림자는 도시에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하루키가 표현하는 그림자는 영혼인 걸까?) 중요한 건 내가 있어야 할 곳을 내가 정확히 알 때 육체와 영혼이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어제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 반대편 세계의 도시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저 구멍만 지나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나를 유혹하고 있는 듯했다. 뒤를 돌아 내 그림자가 잘 있는지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야속하게도 이제는 그 세계로 통할 수 있는 구멍이 완전히 막혔다. 뒤를 돌아보니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미 나는 나만의 도시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