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파리와 21세기 서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전에 토마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다가, 책에서 '고리오 영감'을 여러 번 인용한 것을 보았다. 그렇게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었지만 읽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이 책을 집어들 용기가 생겼다. 단순 호기심뿐이었으리라. 21세기 자본에서 이야기하는 핵심 주제는, 많은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자본을 창출해 낸다는 단순하면서도 불편한 진실이었다. 결국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일을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발자크는 오묘하게도 19세기 파리를 관찰하며, 토마스 피케티가 두 세기가 지난 후에 증명하였던 이 진실을 고리오 영감이라는 소설 안에 담아냈다. 책에서 나오는 법학과 학생 으젠에게 누군가가 알려주는 성공하는 방법 속에서 이는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으젠이 법학도로서 최고의 지위인 판사가 된다면 연에 1200 프랑을 받지만, 그가 사교계에서 100만 프랑을 지닌 상속녀를 만나면 연 이자만으로도 판사가 받는 연봉보다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사흘 전 회사 송년회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시니어분이 옆에 테니스 동호회를 하는 동기 친구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씀하신 게 갑자기 떠올랐다. '지금 해야 할 것은 회사 사람들과 분당이나 용인에서 테니스를 치는 게 아니라, 서울 반얀트리에 테니스 코트장이 있는데 거기서 맨날 혼자라도 테니스를 치는 것이다.' 위에 으젠이 들었던 말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모두가 이 불편한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겸비하고 거기에 뼈를 깎는 노력을 더해 애플의 최고 연봉 엔지니어가 되는 것보다, LVMH 그룹 회장의 딸인 델핀 아르노랑 결혼하는 것이 더 많은 부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이것은 통계적으로도 친절하게 토마스 피케티가 증명해 주었다. 상위 1%의 사람들이 가진 부가 나머지 99%의 사람들이 가진 부를 아득히 뛰어넘는다는 것을.
'고리오 영감' 책에서는 사교계에 진출하여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고, 더 많은 부를 거머쥐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그려낸다. 발자크 본인이 꿈꾸던 모습을 지독하리만큼 잘 표현해 낸다. 고리오 영감의 두 딸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사교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본인의 용모에 신경을 쓴다. 그들에게는 아버지보다 남에게 보일 본인들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 고리오 영감은 죽기 직전까지도 본인이 가진 것을 팔아 딸들에게 주지만, 정작 딸들은 아버지의 임종조차 함께하지 않는다. 그의 장례식에는 으젠과 다른 한 명만이 참여하고, 그렇게 그는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다. 모든 순간을 함께했던 으젠은 다시 한번 사교계를 통해 성공하리라는 욕망을 내비치며 책이 마무리된다.
부모의 아가페적인 사랑과 희생이 책 전반적으로 나타나있지만, 자식의 사치와 욕망이 이를 아득히 뛰어넘어 독자들의 기억 저편으로 보낸다. 책이 현실보다는 과장된 것일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이와 비슷한 것들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무렇지 않게 부모님께 용돈을 타서 생활하는 것. 아무렇지 않게 결혼할 때 양가 부모님에게 집을 사기 위한 돈을 받는 것.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자식에게 해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내가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똑같이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되물림이 되는 것이다. 다만, 사회의 반항아가 되고 싶은 나는 성인이 되고 용돈을 받기를 거부하였고, 결혼할 때도 돈을 받지 않겠다고 종종 부모님께 말하고 다닌다. 누가 보면 어리석은 선택일 수도 있다. 특히 발자크와 토마스 피케티가 보면 나는 아둔한 사람이다. 그래도 돈은 나의 노력에 대한 대가라는 어리석은 신념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태도를 유지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상속받을 돈이 있지도 않다.)
운이 좋게도 대학 때 부자인 친구들이 주위에 많았다. 내가 평생 가져보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과 친해지고 여러 파티에 참석하여 사교활동을 하는 것이 내 성공의 길을 높이는 쉬운 방법 중 하나였을지도 몰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초반에 같이 놀러 다닌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 뒤로는 자연스레 여러 핑계를 대며 그 자리들을 피하기 일쑤였다. 그때 당시 내게 들었던 생각은 하나다. '나는 이들에게 속하지 않아. 어울리지 않아.' 놀기 위해 돈을 쓰기에는커녕, 파트타임으로 번 돈으로 생활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사정이었다. '고리오 영감' 속에 으젠처럼 성공하기 위해 가족에게 모든 돈을 털털 털어 달라는 편지를 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때론 성공에 대한 욕망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게 있을 뿐이다. 그것은 나의 선 굵던 자존심이었을 수도 있고, 나는 나의 방식대로 성공할 거야는 미약한 자신감이었을 수도 있다. 고리오 영감을 보며 너무 현실적인 사회라 우울감에 잠시나마 젖어들었지만, 이내 크리스마스에 성당에서 따뜻한 노래를 들으며 오랜만에 희망찬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