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차]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 빌림비스티아
[Day 9] Santo Domingo de la Calzada > Villambistia
아늑한 공간에서의 하룻밤은 체력을 보충해 주었다. 보다 개운한 상태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저 앞에 나아가야 할 길은 먹구름으로 가득하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지나온 마을은 여명으로 물들고 있다. 마치 행복했던 지난날을 뒤로한 채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묵묵히 걸어가라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 앞에 보이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문득 죽기 전 예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문득 오늘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걱정부터 앞서기 시작한다.
유난히 고요함으로 가득한 순례길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남들보다 조그마한 배낭을 메고 순례하시는 머리가 희끗한 아주머니를 마주쳤다.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문득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은 괜찮냐고 묻고 싶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초면에 실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자, 본인도 한국에 1년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서울에서 지내셨나요?"
"아니요. 저는 대전에 있었어요."
"대전에는 어떤 일로 1년간 머무르셨어요?"
"계룡산에 있는 무상사라는 절에서 1년간 불교 가르침을 배웠어요."
이스라엘 아주머니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종교들을 접하고 있다고 하셨다. 불교를 공부하는 유대인이라니. 원래는 일본의 한 절에서 2년간 지냈었는데, 그때 같이 수련하던 분이 한국인이어서 무성사까지 가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들어보니 무상사는 국제관음서원이라는 곳이 있어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자기는 백인 스님도 만나 뵈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지금 어떤 종교를 믿으세요?"
"저는 그 어떤 종교도 믿지 않아요. 종교는 각자 믿는 신만 다를 뿐 결국 하나로 귀결되더라고요."
"그 귀결되는 하나가 무엇일까요?"
아주머니는 웃음을 지으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종교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그 미소에는 편안함이 담겨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주머니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해답은 당신이 스스로 찾아보세요.'
어릴 때부터 천주교 집안에서 자란 나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지옥은 어린아이에게 꽤 무서운 곳이었다. 나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복음 3장 16절)"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성적인 사고가 자리 잡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 태어난 지 일주일 된 아기가 건강이 약해서 죽으면, 그 아이는 예수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인가? 예수를 믿지는 않았지만 일평생을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인가? 반대로 연쇄살인범이 죽기 전에 자기 죄를 뉘우치고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는 것인가?"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인간은 죽어서 천국을 갈지 지옥을 갈지 알 수 없다.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기는 부활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천국이 있다고 한들 내가 직접 죽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발생할 수는 있다. 내가 한평생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고 살아왔는데, 막상 죽어보니 있었던 것이다. 근데 지옥에 떨어지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적은 확률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매주 성당을 열심히 다니면서 기도를 하면 되는가? 부족하다.
예수를 믿으면 되는가? 부족하다.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한평생 약자들의 편에서 섰던 예수와 비슷하게 삶을 살면 되는가? 오히려 이게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있어 신을 믿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종교가 전하고자 하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여러 말씀을 따르는 것이 보다 중요해 보인다. 매 주말마다 성당에 가서 1시간 동안 의미 없이 앉아있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어쩌면 더 하늘나라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스라엘 아주머니가 말한 것이 이와 비슷한 맥락이지 않았을까?
순례길을 걷다 보면 하루에 평균적으로 마을을 4개 정도 지나게 된다. 모든 마을에는 성당이 꼭 하나씩 있다. 그리고 나는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성당의 내부로 들어가 잠시 묵상하고 나온다. 그 공간이 주는 침묵을 즐기는 편이다. 눈을 뜨고 성당 내부를 둘러보면 화려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미사를 드리는 제대 주변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무적함대 시절의 스페인은 참 돈이 많았구나. 근데 예수는 언제나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을 꾸짖었는데, 이렇게나 화려한 성당이 우상숭배랑 다른 게 무엇일까?' 종교는 알다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