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우산 대신 우비를

[10일 차] 빌림비스티아 > 아타푸에르카

by Zorba

[Day 10] Villambistia > Atapuerca


어제 체력이 많이 남았는지 정식 루트인 벨로라도를 지나쳐 빌람비스타에서 하루 묵었다. 이 조그마한 마을에는 한 개의 식당과 한 개의 알베르게 밖에 없었다. 심지어 식당과 알베르게는 한 지붕 아래 1층, 2층으로 나뉘어 있었고, 우리가 도착할 때쯤 보니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식당 겸 숙소에서 떠들썩한 목소리로 포커를 치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순례자는 나와 부산 친구 둘 뿐이었고, 밤이 깊어올 때까지 그 어떤 순례자도 방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고요 속에서 편안한 숙면을 이루었다.


알베르게를 나서니 부슬비가 우리를 맞이한다. 순례길에서 처음 마주하는 비다. 물론 방수가 되는 고어텍스 바람막이와 등산 바지를 입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번 비는 쉽게 그치지 않을 것 같아 가방 깊숙한 곳에 손을 넣어 부디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던 주황색의 우비를 꺼내 입는다. 머리끝까지 우비를 뒤집어쓰고 땅만 바라보며 걷다 보니 이 길의 난이도가 급격하게 상승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 빗속에서 하염없이 걷고 있는지 신세한탄을 하던 찰나 머리에 두건을 쓰고 러닝을 하는 사람이 우리를 앞질러간다. 규칙적인 하루 일과를 지키는데 날씨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문득 지난봄 영국에 여행을 갔을 때도 세차게 내리는 비에도 꿋꿋이 반바지를 입고 뛰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외부 요인에 영향을 받을 때마다 핑계를 대며 루틴을 지키지 않던 날들이 떠오른다. 저 멀리 반환점을 돌아 이쪽으로 다시 뛰어오는 러너를 보며 꾸준함의 미덕을 다짐해 본다.


추운 날씨에 빗 속을 걸으니 평소보다 더 허기지는 듯하다. 마침 마을 입구에 베이커리를 목격한다. 현재 시각 9시 40분. 구글 지도를 켜보니 베이커리의 오픈 시간은 9시 30분이다. 가까이 가보니 문은 잠겨있고, 인기척도 나지 않는다. 이 베이커리를 지나치면 앞으로 3시간 정도를 굶어야 한다. 비는 그칠 생각도 없다. 절망 속에서 하염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올라!!! 올라!!!"


예상치 못한 샤우팅에 부산 친구는 처음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나중에는 헛웃음을 치고 만다. 배고픔에 굴복당한 자의 이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목격한 이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나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아니면 제빵사의 귀를 때렸는지 닫혀있던 문이 스르륵 열리며 따끈한 빵 냄새가 우리를 맞이한다. 탄수화물과 당을 동시에 채울 수 있는 뺑오쇼콜라는 순례길을 걷는 데 있어 일용할 양식이다. 친구와 나는 가자 하나씩 집어 들고 선반 위 시선을 사로잡았던 내 머리만 한 대왕머핀까지 주문했다. 베이커리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우리는 야외 벤치에 앉아 비를 맞으며 그렇게 아침을 먹었다. 빗물 젖은 빵이었다.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괜히 가방의 무게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힘들다고 평소와 같이 편하게 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땅은 축축하게 젖어있고, 평소에 잘만 보이던 벤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나타나지 않는다. 평소보다 더 아픈 어깨를 부여잡고 빗소리가 가득한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길가의 나무들은 쏟아지는 비에 간신히 잡고 있던 이파리의 손을 놓는다. 길가에 수북한 단풍을 보며 이번 비를 시작으로 계절이 서서히 바뀌고 있음을 예감한다.


길가에 큼지막한 새가 앉아있다. 잘은 모르지만, 생긴 걸로 봐서는 독수리나 매과인 것으로 보인다. 무슨 일로 이 고귀한 몸이 이토록 낮은 곳에 내려와 있나 살펴봤더니, 왼쪽 어깨에 큰 부상을 입은 듯해 보였다. 어떻게 도와줄 수 없는 노릇이라 그 녀석을 두고 갈 길을 간다. 괜히 안쓰러운 마음에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뒤돌아보기를 반복한다. 그 녀석을 바라보는 눈에 부디 다시 하늘을 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문득 또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제비의 다리를 고친 흥부는 수의사였을까.


어느새 오늘 하루를 쉬어갈 아타푸에르카(Atapuerca)에 도착한다. 마을 입구에는 원시인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표지판이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이게 도대체 무언인가 찾아보니, 아타푸에르카는 초기 인류가 거주했던 지역으로써 관련 화석이 풍부하게 발견되는 유적지였다.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이델베르게시스의 뼈와 화석을 비롯해 석기시대에 사용했던 도구 등이 발견되었고, 심지어 유네스코 세계 유산까지 등록되어 국가 차원에서 보호되는 지역이었다. 역사를 좋아하긴 하지만,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에는 그렇게까지 큰 관심이 없었기에 큰 감흥은 없었다.


아타푸에르카에도 알베르게가 하나만 열려있었다. 개인 정비를 마친 후 2층에 마련된 난로 옆에 앉아 몸을 따뜻하게 녹이며 한쪽 구석에서 젖은 옷들을 말렸다. 어제와는 다르게 한 번쯤 길에서 마주친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알베르게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 외에는 달리 묵을 곳이 없기에 모든 순례자들이 모여든 것이었다. 길에서 만날 때마다 반갑게 맞이해 주시던 스페인 부부, 주짓수를 좋아하는 브라질 아저씨,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만난 프랑스 아주머니들, 팜플로나에서 만났던 홍콩 할아버지, 종교 얘기를 해주던 아스라엘 아주머니, 대구에서 온 동생 등 모두가 2층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따뜻한 온기를 나눴다.


고요 속에 잠을 청했던 어제와는 전혀 다른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여느 때와 같이 귀마개를 꺼내고 잠을 청해 본다. 비가 오는 날의 순례길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그래도 자주 오지 않았으면 한다.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까지 과연 나는 몇 번의 비를 더 만날 것인가.




아타푸에르카 1.JPG
아타푸에르카 2.jpeg
아타푸에르카 3.jpeg
아타푸에르카 4.jpeg


이전 10화어떤 신을 믿는지가 중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