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차] 아타푸에르카 > 부르고스
[Day 11] Atapuerca > Burgos
평소와 같은 시간에 알베르게를 떠난다. 전날 비가 내려서 그런지 평소보다 쌀쌀한 날씨에 두 팔이 자연스레 몸을 감싼다. 어둠 속을 걷는 시간도 다소 길게 느껴진다. 해는 비록 늦게 떠오르지만, 비가 휩쓸고 간 하늘은 새벽의 여명을 이제껏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으로 물들인다. 아직 잦아들지 않은 거센 바람에 몸부림치며 고개를 떨구지만, 햇빛에 물든 구름을 두 눈에 조금이라도 더 담기 위해 애써 하늘을 바라본다. 오늘 부르고스(Burgos)에 도착하면 거리상 대략 삼분의 일 정도를 걸은 셈이다. 게임으로 치면 1차 퀘스트를 완료한 것처럼 작지만 소중한 성취감이 밀려온다. 부르고스까지의 걸음이 괜스레 가벼워진다.
붉은 하늘에 감명을 받았는지 오랜만에 스피커로 노래를 듣는다. 대중적이지 않은 외국 밴드 노래였는데, 전주를 듣더니 옆에 부산 친구가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이 노래를 알아?'라는 눈빛을 보내는 나에게 친구는 더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대답하는 듯하다. 같이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은 친구라는 것을 느끼며, 전보다 깊은 내적 친밀감을 느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함께 산티아고까지 당연히 완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운수 좋은 날이라고 했던가. 전날부터 무릎이 조금 불편하다고 했던 부산 친구는 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다가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운동을 자주 하던 친구였기에 무릎이 다쳤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부르고스까지는 대략 10km 정도 남은 시점에서 친구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깐만 쉬면 괜찮을 것 같다는 친구의 말을 나는 온전히 믿었다.
"산티아고까지 이거 갈 수 있으려나."
"우선 부르고스에 가서 병원을 가보자. 진료를 받고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
"하..."
"히치하이킹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부르고스까진 갈 수 있을 것 같아. 조금만 천천히 걷자."
지금까지 그 어떤 순례자보다 빨리 걷던 친구가 절뚝거리면서 천천히 걷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친구는 아픈 내색 없이 묵묵하게 가야 할 길을 걸어갔다. 그 걸음에는 나에 대한 배려도 담겨 있는 듯했다. 다만 그가 옮기는 걸음마다 산티아고에 같이 도착할 가능성도 함께 줄이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구나.'
부르고스까지의 코스는 평소보다 거리가 조금 짧았다. 다만 친구는 지금까지 걸었던 그 어떤 길보다 길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 옆에서 걸음을 맞추며 걷는 나로서도 심리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웠던 길이었다. 축 처진 우리와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한 순례자가 조그마한 배낭을 메고 뛰어온다. 영국에서 온 남자는 오늘이 순례길이 5일 차라고 한다.
"어디에서 출발하셨어요?"
"생장피에드포르요."
"어떻게 5일 만에 부르고스까지 와요?"
"하루에 40km씩 걷고 있어요."
나와 친구는 헛웃음이 나왔다.
"매일 40km씩 걸어도 괜찮아요?"
"짐을 최대한으로 줄여서 3kg만 짊어지니 다닐만해요."
나보다 삼분의 일 정도의 무게만 짊어지고 걷는 그를 보며 나는 아직 다 비워내지 못했음을 또 한 번 느꼈다. 나보다 두 배의 거리를 걷는 그를 보며 왜 이리 급하게 산티아고에 가야 하는지 이유가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대화 내내 그가 보이던 미소에서 나는 어렴풋이 그 답을 찾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자신만의 순례길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재빠르게 앞질러갔고 나는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까지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짧지만 강렬한 만남이었다.
해가 머리 위까지 차올랐는데도 쌀쌀한 날씨는 계속되었다. 어제의 비를 기점으로 앞으로의 순례길은 점점 추워질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부르고스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스포츠용품 가게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내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사기 위한 쇼핑을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 마음에 드는 비니, 목토시, 장갑을 구매했다. 계산을 마치지 마자 새롭게 구매한 방한용품들의 택을 제거하고 각각의 신체 부위에 착용했다. 이 정도면 산티아고까지 날씨 때문에 힘들진 않겠구나 확신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림과 동시의 친구의 무릎 통증은 전보다 심해졌다.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것 같다고 말하며 내가 준 항생제를 먹고 곧바로 잠에 들었다. 나는 알베르게를 나와 뒤편에 있는 언덕을 올랐다. 전망대에 도착하니 도시가 한눈에 담겼다. 장엄한 부르고스 성당 주위로 비슷한 색감의 지붕들이 조화롭게 모여있었다. 마침 해가 서쪽으로 지면서 마을 전체를 노을빛으로 물들인다. 은은한 노란색을 띠던 부르고스 대성당은 점점 붉은색으로 변해간다. 살면서 바라본 도시 풍경 중 단언컨대 가장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매혹되어 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마을에서 한 치의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노을을 즐기고 있다. 문득 한 아저씨가 맥주 한 캔을 나에게 건넨다. 건배를 하고 우리는 노을에 젖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먼저 아저씨에게 악수를 청하며 통성명을 했다. 나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어준 당신을 조금 더 알아가고 싶다는 의미의 악수였다. 그 아저씨는 축구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독일인이었다. 본인이 직관했던 축구 경기를 신나게 이야기하면서 사진을 보여주는데, 노을에 비친 아저씨의 모습이 흡사 어딘가에 몰두하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저 멀리 낯이 익은 얼굴이 보인다. 로그로뇨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만난 프랑스 아주머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며 노을 진 마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어드린다. 동네 친구들이 이쪽으로 여행을 온다고 해서 부르고스에 사흘 정도 머무를 예정이라 하신다. 나는 프랑스 아주머니에게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순례길에서 다시 만나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의 고마움을 담은 악수이며, 서로의 길을 응원하는 의미의 악수였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부산 친구가 낮잠에서 깨어 있었다. 다행히 숙소 근처에 음식점이 있었고, 우리는 스페인식 순대인 모르시야, 하몽, 오징어 튀김이 포함된 플레이트에 샹그리아를 곁들였다. 모르시야는 우리나라 순대와 비슷했지만, 겉은 살짝 튀긴 것처럼 바삭했고 속은 부드럽게 씹혔다. 샹그리아는 살면서 처음 먹어봤는데 달짝지근하고 톡 쏘는 맛이 정확히 내 취향이었다.
우리는 다친 무릎을 두고 앞으로에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나는 내일 혼타나스(Hontanas)로 떠난다. 친구는 내일 부르고스에 있는 병원에 가기로 한다. 최선은 무릎이 회복될 때까지 부르고스에 머물다가 내가 있는 곳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 것이다. 얼마나 쉬어야 할지는 예측이 어렵고, 나는 그동안 묵묵히 갈 길을 걸어가기로 한다. 최악의 상황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산티아고는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설득하고 싶었지만, 괜히 무리하게 걷다가 무릎 상태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기에 그 말이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친구의 무릎이 기적적으로 낫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잘 준비를 마친다. 잠들기 전 부산 친구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인사를 건넨다. 서로 한숨만 내쉴 뿐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게 갑작스레 헤어질 줄은 몰랐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 있다. 순례길에는 당연한 것이 없다. 내일부터 나는 다시 혼자 나의 길을 걸어가겠지만, 그 시간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샌가 친구가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 다시 이 길을 같이 걸어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