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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팬 Aug 16. 2023

혁명이나 이념보다 더 숭고한 일은,
먹고 사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자

스위스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스위스에 갈 때는 이태리 쪽에서 알프스산맥을 넘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오스트리아 쪽에서 알프스산맥을 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갔을 때는 프랑스 쪽에서 알프스산맥을 넘었습니다. 프랑스 쪽에서 알프스산맥을 넘어가면 ‘루체른’이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스위스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입니다. 처음 스위스에 갔을 때 루체른 호숫가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 사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일정이 바빠서 볼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갔을 때는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야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간 스위스는 여전히 평화롭고 풍요로워 보였습니다. 오늘날의 스위스는 세계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는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높은 국민소득과 완벽한 사회복지제도로 마치 지상천국 같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스위스는 달랐습니다.  

    

불과 이백여 년 전만 해도 스위스는 너무나 먹고 살기 힘든 나라였습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라곤 겨우 25%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척박한 땅에서 허덕허덕 살아가야 하는 유럽의 최빈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먹고살기 위해 남자들은 어쩔 수 없이 용병 일을 해야 했습니다.  

    

돈 받고 남의 나라 전쟁터에 나가 싸워주어야 하는 것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오로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무수한 남자들이 피 흘리며 싸우다 죽어갔습니다.  


당시 스위스 용병은 유럽 최고의 브랜드였습니다. 사자 같은 용맹함으로 많은 고객들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프랑스로 팔려 가 루이 16세의 왕궁을 지키고 있는 용병들도 있었습니다. 하필 그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성난 군중들이 파죽지세로 루이 16세가 머무르고 있는 궁전 앞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이미 왕을 지키던 군대는 다 도망가 버렸고 궁에는 스위스 용병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궁을 공격하기 직전 시민군의 대표가 스위스 용병들과 협상을 합니다. 우리가 싸울 대상은 왕이지 당신들이 아니다.   

   

당신들은 그저 돈 벌기 위해 용병으로 온 사람들이니 더 이상 우리 앞을 가로막지 말고 조용히 떠나라. 처자식이 기다리는 당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런 제안을 받고 스위스 용병들이 고민합니다.   

   

저 사람들의 요구대로 우리가 왕을 내어주고 이 궁을 떠난다면 물론 우리는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이제부터 누가 우리 스위스 사람들을 용병으로 고용해준다는 말이냐?  

    

더 이상 용병 노릇도 하지 못한다면, 가난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냐? 불쌍한 우리 처자식들을 과연 무슨 수로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말이냐?   


결국 시민군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인산인해처럼 몰려오는 시민군에 맞서 싸우다 모조리 전멸을 당합니다. 칠백팔십육 명 중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더 처참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납니다. 흥분한 군중들이 스위스 용병들의 시체를 훼손하기 시작합니다.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여러 토막을 내고 심지어는 남자의 성기까지 도려냅니다.  

    

시민군들이 잘라낸 용병들의 성기를 깃발 위에 꽂고 자랑스럽게 시가지를 행진합니다. 어느덧 혁명의 고매한 이상은 사라져버리고 야만과 광기만이 군중들을 지배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 가난한 사람들이 역시 먹고살기 위해 용병 노릇을 하러 온 또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그처럼 무자비하게 도륙해버립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무수한 혁명이 일어났었고 이념 대립으로 말미암은 치열한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보다 숭고한 이상의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혁명의 이상은 물론 숭고합니다. 아니, 숭고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혁명보다 이념보다 더 숭고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일입니다.    


스위스 용병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도 혁명보다 이념보다 더 중요한 일은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스위스 용병들은 그 일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 일이 어찌 혁명보다 가치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그 사람들의 무덤에 침 뱉을 수 있겠습니까?   



 




훗날 덴마크의 어느 조각가가 스위스 용병들의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위스까지 찾아와 루체른 근처의 거대한 암벽 바위를 깎아 사자상을 조각합니다.


사자는 용병들을 상징합니다. 용맹한 사자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자의 표정이 너무나 애절합니다.      

죽어가면서도 왕을 지키려는 듯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방패를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눈에 그 방패는 용병들이 먹여 살려야 할 굶주린 처자식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사자 조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하필 부슬부슬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꼭 용병들의 눈물처럼 느껴졌습니다.    


비를 맞고 있는 사자의 모습이 그래서 더 슬퍼 보였습니다.      


사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런 문구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혁명이나 이념보다 더 숭고한 일은, 먹고 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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