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덩어리들과 태평양 건넌 사연
부모를 찾는 해외입양아들의 애절한 사연이 T.V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새까만 머리카락, 쭉 찢어진 눈매. 조금 튀어나온 광대뼈. 한눈에 보기에도 영락없는 한국인의 얼굴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우리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네덜란드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네덜란드인으로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스무 살이 넘도록 네덜란드인으로 살던 이 아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생부 생모를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답니다.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한국에 왔습니다. 그리고 이 푹푹 찌는 무더위 속에 온갖 곳을 다 돌아다니며 부모의 행적을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자 마침내 T.V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물끄러미 T.V 화면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잊고 있던 아주 오래전의 기억 하나가 아스라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부부도 뉴욕 갈 때 해외입양아를 에스코트했던 적이 있습니다. 90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해외입양아를 에스코트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인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공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어느 유명한 아동복지회 관계자로부터 입양아를 데리고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말로만 듣던 해외입양아 에스코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입양아를 데리고 가면 미국행 비행기를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탈 수 있다는 실리적인 요인도 작동했습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걱정은 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상의한 끝에 모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출국 날이 다가왔습니다. 위탁모 가정으로 가서 데리고 갈 두 아기를 처음 만났습니다.
한 아기는 생후 넉 달 된 민영이란 여자아이고 또 한 아기는 생후 육 개월 된 태형이라는 사내아이였습니다.
겨우 두 달 차인데 태형이가 민영이보다 훨씬 크고 건강해 보였습니다. 잘생긴 사내 녀석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 품에 안겨서도 낯도 안 가리고 벌쭉벌쭉 잘도 웃었습니다. 이 녀석은 어느 집에 가서도 사랑받고 잘 자랄 것 같이 보여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자아이인 민영이는 척 보기에도 너무나 발육상태가 부진해 보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핏덩어리를 데리고 어떻게 그 먼 미국까지 갈 수 있겠나?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결국 아내가 민영이를 맡고 내가 좀 더 큰 놈인 태형이를 맡기로 했습니다. 아기들을 하나씩 품에 안고 위탁모의 집을 나오는데 위탁모 아주머니가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이 핏덩어리들을 계속 남의 나라로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번번이 가슴 아프다고 했습니다. 괜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나도 아내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눈시울도 뜨거워졌습니다.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하필 비행편이 최악이었습니다.
직항이 아니라 동경을 경유하는 비행편이었습니다. 그것도 동경에서 바로 뉴욕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디트로이트에 도착해서 국내선으로 한 번 더 갈아타야 하는 복잡한 노선이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갓난아기들에겐 너무나도 험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래도 동경 하늘을 떠날 때까지는 녀석들이 그럭저럭 잘 견뎌주었습니다.
그러나 비행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울고 보채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낮과 밤이 바뀌고 태평양 건너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할 즈음엔 아예 발작하듯 악을 쓰며 울어댔습니다.
울부짖는 녀석들을 달래느라 한숨도 못 자고 거의 녹초가 되었습니다.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기진맥진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천사들을 만났습니다.
입양아들을 돌보는 자원봉사 할머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흑인 할머니 한 분과 백인 할머니 한 분이 뉴욕행 비행기가 뜰 때까지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아기들을 맡아 돌보아주었습니다.
한국말로 자장가까지 부르며 아기들을 돌봐주고 있는 할머니들을 바라보며 문득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한국 아기들이 저 할머니들의 손을 거쳐 갔기에 까맣고 하얀 미국 할머니들이 저만큼 능숙하게 한국말 자장가를 줄줄 외우고 있다는 말이냐?
정말 디트로이트 공항의 날개 없는 천사들이었습니다.
뉴욕 가는 국내선 비행기에 올랐을 땐 이 녀석들도 그만 지쳤는지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이 녀석들이 잠들면 우리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녹초가 되어 곤히 잠든 녀석들의 얼굴을 바라보자 오히려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졌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이 녀석들과 헤어져야 합니다. 이 낯선 나라에서 과연 이 핏덩어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떤 운명일까? 이 녀석들을 입양할 양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가슴이 무거워졌습니다.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왜 우리나라에서 키워야 할 아기들을 남의 나라로 데리고 온 거지?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서 아기들을 기다리고 있던 양부모들을 만났습니다. 양부모들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너무도 선한 얼굴들이었습니다. 환한 웃음으로 아기들을 품에 안는 양부모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런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안심할 수 있겠구나. 절로 감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기들을 떠나보내며 아내가 울었습니다. 나도 억지로 눈물을 참았습니다.
미안하다. 이 녀석들아. 정말 미안하다.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다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 일이 벌써 수십 년 전 일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이렇게 입양아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되면 여지없이 그때 그 일이 떠오릅니다.
그 녀석들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잘살고 있을까? 결혼은 했을까? 아기는 낳았을까? 아기를 낳았다면 어떻게 기르고 있을까?
잊어버릴 만하면 입양된 아기가 양부모의 학대로 짧은 생을 마쳤다는 뉴스가 나오곤 합니다. 그런 뉴스가 방영되면 모두 다 벌떼처럼 와글와글 분노하며 어쩌고저쩌고 정부를 성토합니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분노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이만큼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우리는 아직 변한 것이 없구나. 이만큼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T.V를 꺼도 한동안 화면에서 보았던 해외입양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쉬 잠이 오지 않던 그날 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