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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팬 Aug 08. 2023

싸우니까 부부다.

창밖의 남자. 연애의 추억

아내와 싸웠습니다.    


아내가 올케언니를 만나러 간다고 문을 쾅! 닫고 나갔습니다. 이제는 나도 도통(?)해서 문 닫는 소리만 들어도 저게 몇 시간짜리 가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세게 쾅! 닫고 나가면 이건 오밤중에나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중간 수준으로 쾅! 닫고 나가면 대개는 저녁 시간 전에 들어옵니다.


아주 약하게 쾅! 닫고 나가면 이건 그냥 금방 들어오겠다는 것입니다. 이번엔 중간 수준으로 쾅! 닫고 나갔으니까 아마 저녁밥 챙겨주러 해 떨어지기 전에는 들어올 것입니다.   


창밖으로 자동차 시동 걸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니 문득 연애 시절 싸우던 생각이 납니다. 연애할 때도 징그럽게 참 많이 싸웠습니다.


대부분 사랑싸움이라 티격태격하다가도 금방 화해하고 뽀뽀하고 헤어지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좀 심하게 싸웠습니다.


열 받은 아내가 이젠 정말 끝장이다. 다시는 안 만난다. 절교를 선언하고 떠났습니다.


나도 열받아서 갈 테면 가라. 안 잡는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처럼 쿨하게 떠나보냈습니다.


더럽다. 더러워. 세상에 어디 여자가 너 하나밖에 없는 줄 아니? 나도 마음만 먹으면 종로 바닥 돌아다니는 예쁜 계집아이들 한 시간에 두 트럭도 넘게 꼬실 수 있다!    


        

***     



그렇게 한 주가 가고 또 한 주가 지났습니다. 전화를 할까말까 손가락이 근질근질했습니다.  


어느덧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습니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긴 머리 소녀를 보면 가슴이 덜컹덜컹 무너졌습니다. 저 멀리 분홍색 스커트 자락 펄럭이며 걸어가는 여자를 보고 혹시나 싶어 골목길까지 쫓아간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아내가 근무하는 포천의 중학교로 찾아갔습니다.  


터미널에서 내려 학교 정문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데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다 집에 돌아갔는지 운동장엔 아무도 없고 불 켜진 본관 건물 유리창 너머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곧 현관 계단으로 선생님이나 교직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제 퇴근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무 그늘 뒤에 숨어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눈에 익은 분홍색 원피스가 보였습니다.


저쪽 창가에 아내가 앉아 있었습니다. 혼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노을빛이 아내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지는 햇살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몰래 숨어 아내의 모습을 훔쳐보는데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제껏 알고 있던 여자가 아닌 듯했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신비로운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멀리 학교 담장 밖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만 들어보니 귀에 익은 노래였습니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바람결에 실려 날아왔습니다. 노래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내 가슴을 절절히 적셨습니다.     


      

***     



창밖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돌아서 눈 감으면 강물이어라.      

  

한 줄기 바람 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이 되어내 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     



창밖의 남자가 창안의 여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젠 그만 들어가 봐야 할까? 아니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만나면 뭐라고 말할까? 나를 보면 반가워할까? 아니면 아직도 화가 안 풀렸을까?   


창밖의 남자가 창안의 여자를 바라보며 애만 태우는 사이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창안의 여자는 여전히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     



사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덜컹!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앗! 싸우고 나간 마귀할멈(?)이 돌아온 모양입니다.  


잽싸게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아픈 척해야 합니다. 살아남으려면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야 합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하하하.


아프니까 청춘이고

    

싸우니까 부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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