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터팬 Aug 05. 2023

청주여자교도소에서 온 팬레터

여보. 나 당신 존경하나 봐.

CBS에서 방송 출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새롭게 하소서’란 프로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새롭게 하소서’는 CBS를 대표하는 간판프로였습니다.    

  

탤런트 정애리 씨가 방송 진행자로 있을 때였으니 꽤 오래전 일입니다. 두 시간 정도 대담 프로를 진행한 후 이틀 연속 방송이 나갔습니다.     


그때는 내가 만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만화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화제였고 그밖에 만화를 선교의 도구로 활용했던 여러 사례에 관한 대화들도 나누었습니다.   

   

방송이 나가자 전국에서 수많은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그중에 모 교회 장로님도 계셨습니다. 그분이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몇 번씩이나 전화하셨고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지하철공사에 전자기기를 납품하는 어느 중소기업 사장님이었습니다.


최근에 사업이 부도나서 구속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구치소에 수감 되어 암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란 프로에 웬 만화가 한 사람이 나와 만화를 사용한 선교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듣다가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를 여기서 나가게 해주시고 제 사업을 다시 회복시켜주시면, 저 만화가를 찾아가 만화책을 만들겠습니다. 전도용 만화책을 만들어 전국의 모든 구치소 교도소 경찰서 유치장에 보내겠습니다.”


그러니까 재소자들을 위한 문서선교를 하겠다고 서원기도를 한 것입니다.   


얼마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얽히고설킨 복잡한 채권 채무 문제가 기적처럼 하나하나 해결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출감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공장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고 지하철공사에도 이전처럼 납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다 방송을 듣고 기도한 후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전도용 만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려달라는 내용이 장로님 자신의 간증이기도 했습니다.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날밤을 새워가며 만화 원고를 완성했습니다.


원고가 완성되자마자 바로 출판에 들어갔는데 나도 놀랄 만큼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을 찍어냈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구치소 교도소 경찰서 유치장에 무료로 배포되기 시작했습니다.

  

팬레터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특히 청주여자교도소에서 가장 많은 편지가 왔습니다.    


여자 재소자들의 편지 속에 담긴 애절한 사연들이 가슴을 울렸습니다. 세상에 이런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구나.


어느덧 편지로 신앙상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나 만나기를 사모하는 분들도 생겨났습니다.  

 

‘세진회’라는 교정선교를 하는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세종문화회관을 빌려 재소자들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는데 해마다 나도 초대받아 갔습니다.


청주여자교도소의 한 재소자가 그 음악회에 합창단으로 참여한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내 가슴을 울렸던 기구한 사연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아내와 함께 음악회에 갔습니다. 세진회에서 우리 부부를 위해 무대가 가장 잘 바라보이는 앞줄 맨 가운데 좌석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음악회의 모든 순서가 끝나고 마지막 프로그램 하나만 남았습니다.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면서 어둠 속에서 여자 재소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저 여자로구나. 아내도 내 손을 꽉 잡았습니다. “여보. 저 여자인 것 같아.”   


내 가슴을 울렸던 바로 그 사연이었습니다. 여자가 낭송하는 편지 내용을 듣고 세종문화회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편지 낭송을 다 마친 여자가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이런 멘트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화가 박찬민 선생님 혹시 오셨나요? 어디 계신가요?”


아내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무대 위에서, 무대 아래서, 서로 마주 보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관중이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며 그 여자를 주목하고 또 나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여자가 나 있는 쪽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선생님이 그린 만화를 보고 이렇게 많은 분들 앞에서 엄마에게 쓴 편지를 낭송할 수 있는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제부터 정말 새롭게 살겠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이 떠나갈 듯 큰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나도 무대 위의 여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습니다.   


공연이 끝나 세종문화회관을 나올 때쯤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우산 속에서 아내가 갑자기 내 팔짱을 와락 끼었습니다. 그리고 생전 안 하던 징그러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보. 아무래도 나 당신 존경하나 봐.”   


별꼴이 반쪽이야. 존경한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좋은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란하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문득 그분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오래전 일을 추억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내 아내는 내가 지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