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공항동 러브스토리
“당신 아까부터 뭘 그리 생각해?”
아내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김포공항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는 어느덧 공항동 가는 지하도 입구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은퇴 후 짧은 제주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무슨 일을 시작해야 할까?
은퇴를 준비하며 여러 가지 은퇴 이후 할 일들을 계획했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완벽히 새로운 삶을 준비해놓았다고 자부했었습니다. 은퇴 후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제주살이하는 동안 구상한 것들을 잘 정리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바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우리 생각처럼 그리 호락호락 흘러가지만은 않습니다.
생각도 못했던 변수가 생겼습니다. 오랜 기간 구상한 일들이 시작 단계에서부터 틀어지게 생겼습니다. 결국, 제주에 내려가선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바다만 멍하니 바라보다 그냥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막 은퇴한 사람이 뭘 그리 서두르려고 해? 당분간은 무조건 쉬어요. 쉬어.”
아내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내 사전에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몸은 비록 은퇴했어도 마음만은 아직 청춘(?)이니 어떤 일이든 빨리 새로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먼저 시작해야 할까?
건널목 신호등 앞에서 운전대 잡은 손을 놓고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습니다. 문득 여기가 공항동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래 맞아. 여기가 공항동이지. …공항동. 공항동이라. 공항동 하면…
아. 맞아! 그때 여기서 바로 그 일이 일어났었구나!
하고 까마득한 옛 추억 하나가 아스라이 떠오르려고 하는 순간…
“목말라. 저기 편의점에서 생수 하나 사자.”
아내의 말에 편의점 앞에서 차를 멈췄습니다. 생수 두 개를 사고 막 문을 나서려 할 때, 왠지 모르게 이 장소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들어가 직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여기가 옛날에 버스 종점 있던 데 아니었나요?”
알바생처럼 보이는 앳된 청년이 잠시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저는 잘 모르는데요 주인아저씨가 옛날엔 여기가 종점 자리였다고 말씀했던 것도 같아요.”
버스 종점!!
아물아물하던 추억 하나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눈앞에서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구나! 여기가 바로 거기였구나!”
아내와 한창 연애하던 20대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도 밤늦도록 데이트하다 덕수궁 앞 버스 정거장에서 헤어졌습니다.
“나 오늘은 언니 집에서 자고 갈 거야.”
공항동에 아내와 제일 친한 사촌 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언니 집에서 자고 간다고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올랐습니다. 공항동 가는 63번 버스였습니다.
아내와 헤어져 집에 돌아왔을 때 빈방에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습니다. 이 밤중에 누구야? 수화기를 드니 아내였습니다.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찬민 씨. 어떡해? 언니가 없어. 형부랑 어디 간 모양이야.”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언니가 집에 없다면 길에서 헤매다 파출소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한데서 밤을 지새우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당시 공항동은 황량한 벌판이었습니다. 처녀가 혼자 밤을 지새우기엔 너무도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파출소로 끌려간다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금방 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집을 뛰쳐나오는데 일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큰길로 나와 따따블을 외치며 지나가는 택시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다행히 그쪽 방면으로 차고가 있는 택시를 만났습니다.
따따블의 유혹에 빠진 택시 기사는 통금이 임박한 심야의 거리를 미친 듯이 질주했습니다.
한 남자는 사랑에 목숨을 걸었고 한 남자는 돈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두 남자가 목숨 걸고 치달린 결과 정확히 통금 5분 전에 버스 종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가 버스 종점입니다!”
나를 내려놓자마자 택시는 총알 같이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캄캄한 밤거리 어디에도 내가 찾는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다. 하는 순간, 줄지어 서 있는 66번 버스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뿔싸! 여기는 63번 버스 종점이 아니고 66번 버스 종점이었습니다. 돈만 밝히는 저 괘씸한 택시 기사 녀석이 나를 63번이 아닌 66번 버스 종점에 내려놓고 뺑소니친 것입니다.
드디어 시간은 자정을 넘겼습니다.
저 멀리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63번 버스 종점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뒤에서 고막을 찢는 방범들의 호각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칠흑 같은 밤길을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벌써 사십 수년 전의 일입니다. 세상에… 여기가 바로 거기였다니…
“자. 여기 물.”
차 안으로 들어가 생수를 건네며 아내의 얼굴을 새삼스레 찬찬히 바라봅니다.
야밤에 한 남자를 미친 듯이 질주하도록 만들었던 그날의 긴 머리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웬 할머니(?) 한 분이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당신 여기가 어딘지 알아?”
“…여기? 여기가 어딘데?”
창밖을 두리번거리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은퇴 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떠올랐습니다.
“여보. 나 방금 제일 먼저 할 일을 찾았어.”
“…무슨 일?”
“응. 연애.”
“…연애?”
“그래. 더 늦기 전에…”
아내의 손을 가만히 끌어당겼습니다.
“여보. 우리 다시 연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