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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고침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조회수 100만과 그리고 고시원 80일차

by 파타과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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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인이 대화를 하다 결론을 내려줬다. 너는 뭘 하고 싶어? 회사에서는 뭐가 문제였어? 회사에서 과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까? 다음에도 회사를 갈 거야?


그럼 넌 그냥 네 일을 해야겠네.

그래서 헛짓거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만들어봤다. 원래는 스마트스토어로 육아용품 같은 걸 팔아보려고 했다가, 학생 지원 어쩌고를 받으려고 사업자를 폐지했던 거였다. 그리고 다시 뭔가 떠올라서 해보려 하던 찰나에, 기존 사이트가 수정이 안 되길래 일단 있는 사이트로 해봤다.


그리고 친구랑 오랜만에 통화를 하고, 역시 글로서는 부족하구나 생각하면서 자려던 참에 메일이 왔다. 결제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2. 컨설팅이라기엔 거창하고, 사람들 이야기 듣고 글감도 찾을 겸 해서 만들어본 거였는데 신기했다. 막상 주문을 받고 나니 그다음에 일정 잡고, 있지도 않은 배송정보 등을 입력하고 하느라 꽤 고생했다.


메일이나 문자는 너무 개인정보고, 네이버 톡톡은 고객이 불편하고, 네이버 예약을 만들어보려 했는데 오프라인 장소가 있어야 기능이 가능했다. 그래서 일단 톡톡으로 일정을 조율했다. 이번 주 목요일이다. 떨린다.


3. 상담해보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거 같다. 다행이다. 대표에게 필요서류를 부탁한다는 카톡 연락이, 잘렸다는 말보다 더 떨렸다. 나도 참 희한한 인간이다.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도와주었는데, 2년 전에는 나도 저런 역할이었지, 하면서 기분이 묘했다.

4.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했다. 친구는 이직 등 커리어나 연봉 고민을 이야기했다. 글을 본 친구는 대충 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2년 가까이 글을 본 친구가 이렇게 반응이 좋았던 글은 처음이라며 나보다 더 놀라워했다. 실은 나도 최근 이틀 동안 새로고침을 하루에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5. 친구가 네 글이 인기가 많네. 사람들이 타인의 불행을 보고 즐거워하네. 의문을 던졌다. 빵 터지긴 했는데 그것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이태원 참사도 그렇고 세상에 사건 사고는 많다. 아마 오늘도 거리에서 수십 명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거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나와 관계없는 이의 불행은 사실 숫자일 뿐이니까. 해외에서 전쟁으로 수백수천 명이 죽고 다친 걸 듣고, 정말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있을까? 반대로 그 전쟁을 직접 보여주고 피해자를 조명하면 어떨까? 그때부터는 그 사건은 우리에게 관계있는 일이 된다.

불행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거기에 감정이 잔뜩 들어가게 이야기를 섞으면 즐겁기보다는 보기 싫어진다. 누군가는 일상이 어려울 정도로 감정 동요를 겪는다.


그리 큰 불행이 아니었고, 감정을 빼려 했고, 제목 어그로도 끌었고, 유머도 조금씩 섞었다. 감정을 비우고 글을 쓰기 위해 소주 2병은 비웠다.


그렇지만 나도 가끔 타인의 가벼운 불행을 고소해하는 인간이다.

5. 헬스장 짐을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토요일 오전 1시에 왔다. 짐을 토요일 오후에 찾아가라는 내용이었다. 왜 내 짐을 가져가면서도 가져갈 수 있나 불안해해야 하는 건지, 왜 새벽에 알려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정이 안 돼서 전화를 했는데, 당연히 받지 않았다. 답답함에 당근 마켓으로 비슷한 피해자를 찾았고 단톡방을 발견했다. 한 아저씨는 여기서 20년 운동하면서, 사장이 자주 바뀌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20년이나 있던 곳이었다 여기. 헬스장 신규 모집 사기는 들어봤는데, 20년 있던 곳이 사라질 정도면 정말 어려웠던 걸까? 아무튼.


나도 나약하기에 남에게 뭐라고 안 하는데, 이 사람은 진짜 태도와 마인드가 문제다.


6. 헬스장 샤워 바구니에 로션이랑 샴푸, 면도기 등을 같이 두어 늘 로션이 젖어있었다. 그런데 한 아저씨는 늘 보송보송하게 로션을 꺼내 쓰길래 뭔가 했더니 샤워 바구니랑, 화장품 바구니랑 따로 나눠서 쓰고 있었다. 요즘 나도 고시원에서 화장품 바구니랑 샤워 바구니를 나눠 쓰고 있다. 그걸 본 옆방 남자도 나를 따라 해 바구니를 두 개로 나눴다.


7. 베개를 자주 안 빨아선지, 공기가 안 좋아선지 피부에 하나둘씩 작게 뭐가 생긴다. 학창 시절 내내 여드름 한 번 나지 않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유일한 장점인데, 3개월 있는 동안 자잘하게 뭐가 나고 사라지면서 흔적을 남겼다. 몇 년 만에 화해 어플을 깔고, 리뷰를 찾아보고, 올리브영에 갔다 왔다. 그러다 귀찮아져서 귀찮더라도 하루 두 번씩 씻는 걸로 대체하고 있다.


8.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을까 하다가 말았다. 뭔가 일이 잔뜩 있었던 거 같은데 막상 다이어리를 보니 별일 없었다. 나에게는 회사가, 회사에게는 내가 그렇게 큰 의미가 없었던 걸까.


9.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는데 차가 인도 반 정도를 침범했다. 별생각 없이 건너가는데, 반대쪽에서 오던 자전거 탄 아저씨가 차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지나갔다.

10. 유튜브로 많은 걸 접하다 보니 유튜버가 꽤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SNS 없이 업계에서 유명한 사람도 꽤 많았다. 유명한 사람이 유튜브를 하면서 더 유명해진 경우도 있고, 유명하지 않다가 유튜브를 하면서 유명해진 경우도 있지만, 그런 거 없이 그냥 실력과 평판만으로 업계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키보드워리어인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11. 애인과 대화를 하다가 문득 느꼈다. 주변 사람들에게 늘 노력과 시간만 투입한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하곤 다녔다. 너는 만화가도, 부자도, 프로그래머도 될 수 있어. 그러다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다.


학창 시절 공부하고, 취업 준비하는 것만큼 돈에 대해서 그렇게 노력하고 고민해봤어?

나야말로 언행일치를 하지 못하고 있다.

12. 어머니가 작게나마 무언가 일을 하려고 하신다. 이력서를 작성해서 낸다길래 잠깐 봤더니 이메일 제목도 이름으로, 파일 이름도 이름으로 작성해서 내려고 하셨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더니 꼬우면 연금이 있으니 뽑지 말라고 하신다. 이게 33년을 일한 자의 패기일까.


13. 가끔, 아주 가끔 책을 많이 읽었다고 말하고 다닌 게 부끄러워진다. 그 책만큼 스스로가 변하고, 나아졌는가 하면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 정치인 중에서 대학 도서관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고 다닌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자랑거리인지는 모르겠다. 일단 수십만 권을 몇 년 안에 읽는 게 가능한지가 당연하게 생기는 의문이고,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하루에 10권, 20권씩 읽었다는 건데 그 속도와 양만큼 흡수하고 체화시켰는지가 두 번째 드는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수십만 권을 읽었는데도 부자나, 현자, 리더, 성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남들보다 콘텐츠를 많이 접한 게 자랑이라면 드라마나 영화를 몇 만 시간씩 본 사람도 세상에는 널려있다. 미국인들은 일주일에 TV를 몇십 시간은 본다.


하루는 전 회사 신입이 취미가 뭐냐고 해서, 독서라고 했다. 한 달에 몇 권 읽냐고 해서, 요즘 책은 안 읽고 브런치는 봐요. 웬만한 책 한 권만큼 하루에 읽을 걸요, 말하려다 귀찮아질 거 같아 일주일에 한 권이라고 했다. 사실 읽는 거만 따지면 삼일에 한 권은 될 거다. 그랬음에도 일주일에 한 권이라는 숫자에 놀라서 민망해졌다. 일본 여자들이 가슴사이즈를 줄여 말하는 경우가 있단다. 가슴이 크다고 하면 생기는 이미지가 싫어서란다. 그래서 요즘 나도 어디 가서 책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아무것도 모른 척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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