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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30대생존기

0.9년차 마케터의 상반기 회고록

프로덕트의 종말

by 파타과니아

1. 최근에 재밌는 글을 봤습니다.


요즘 유튜브나 플랫폼에서 많이 보이는 20대 초반인, 스타트업에 다니는 분을 인터뷰한 글이었는데요. 글에서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충 뉘앙스는 이랬습니다.


"이제 프로덕트의 시대는 갔다. 한때 프로덕트를 만들긴 했지만, 프로덕트는 해자가 없다. 나중에는 엔터나 방산쪽 사업을 하고 싶다"


2. 최근 비싼 프로덕트 강의를 신청한 입장에서 어이가 없었죠. 한편으론 이해도 됐습니다. 이제 끝물이기에 강의를 파는 거죠. 이제 아이디어도 ai한테 묻고, mvp도 ai한테 짜달라 하고, 데이터도 ai한테 정리해달라 합니다. 에어비앤비가 PM을 없앴다는 소식도 꽤 큰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이터와 함께 유저에게 더 좋은 경험을 주는 걸, 감각 좋은 디자이너가 결정 못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평범한 문과 직장인이 주말에 짬내서 쫓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시장이 빨리 바뀌고 있습니다.


3. PM을 왜 꿈꿨냐 하면 (구멍가게에서) 데이터도 하고, 퍼널도 하고, 매체광고도 하고, 바이럴도 하고, 백엔드나, 프론트엔드도 찾아보고 막 그렇게 했던 경험을 활용할 수 있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꼭 PM을 안 해도 될 거 같습니다. 원래 전 잘 포기하거든요. 그냥 내 서비스를 만들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죠.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꼭 내 서비스가 아니어도 될 거 같습니다. 그냥 내 무언가면 좋을 거 같습니다.


4. 그래서 요즘은 재밌고 개성있는 오프라인 공간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츠타야 뽕을 맞고 2019년 일본 교환학생을 떠난 저니까요. 그래서 금밤이나 주말이면 몰아서 그런 공간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꽤 즐겁습니다. 메모도 열심히 하고 있죠.


1.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는 말에 뼈저리게 공감하게 됐습니다.


꽤 무던하고 습관성으로 하는 일들이 많아서 챌린저스나 그런 서비스들이 이해가 안 됐는데, 가끔은 힘에 부치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땐 억지로라도 돈을 내고 무언가를 예약합니다. 좋은 공간이라거나, 비싼 카페라거나, 전시회라거나. 돈을 걸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가게 되니까요.


2. 잡다한 일정 등도 다 캘린더에 박아둡니다.

18시 퇴근. 19시 도서관. 20시 필라테스. 21시 헬스장. 22시 본가 복귀 막 이렇게요.


안 그러면 머리에 든 생각이 많아서 몸이 자동으로 착착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애플워치에 뜬 30분 전 알림을 보고 겨우 움직이죠.


몇몇 것들은 자동으로 걸어두기도 합니다. 이체, 투자, 저축, 보험 등등은요.


1. 쌓여야 사업이고 프리랜서는 쌓이지 않는다고 한 선배가 말했습니다.


마케터의 미래가 프리랜서라면 맡을 수 있는 일의 규모에 한계가 있고

대행사라면 인력 관리를 해야 합니다.


두 개 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TOP3 대행사쯤 되는 곳의 임원이란 사람도, 노동력 베이스의 마케팅 대행사는 그만 하고 자신 브랜드나 프로덕트를 가지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보통 1000억 브랜드를 맡던 사람이 독립해서 100억 브랜드를 맡곤 하죠. 그래서 다들 큰 클라이언트를 맡고 싶어하고, 큰 클라이언트를 맡은 걸 자랑스럽게 내세웁니다.


제가 일하는 곳도 작지는 않지만, 여러 산업과 업종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은 합니다.


2. 사람들과 부딪히기를 그렇게 선호하지 않고, 가끔은 글로 저 인간은 대체 왜 저럴까 하고 싸재끼기도 해야 하는데, 사람들과 많이 부딪히는 일이라면 리스크가 큽니다. 물론 먼 미래에 사람들과 많이 부딪히는 일을 한다면 자아를 숨기고 또 익명으로 글을 쓰겠지만요.


3. 아직까지는 마케팅이라는 업무가 꽤 즐겁습니다.


될 듯한데 안 되고, 안 될 거 같은데 됩니다.


퍼포먼스를 다 했다 싶으면 또 컨텐츠를 손봐야 하고, 컨텐츠를 많이 개선했다 하면 갑자기 퍼포먼스의 효율이 나쁩니다. 퍼포먼스를 하면서도 검색광고나 CRM이나. 언드나 시딩이나 또 많은 걸 고민해야 합니다. 작은 회사라서 BM이나 상품구성 이런 것도 한번씩 같이 고민하는데요, 한 마케터가 이 많은 걸 할 수 있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전문성이 쌓이나 걱정은 듭니다. 하지만 성과압박이 엄청 심하지 않은 회사에서,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긴 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즐겁다고 말하는 걸 보면 저는 프로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성과를 내고 극복해야 하는 게 프로인데, 시행착오랍시고 자위하고 있으니까요.


이 매주, 매달마다 찾아오는 크고작은 문제들을 너끈하게 결정할 경력이나 실력이 되면, 그 다음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요. 사실 일이 즐거운 게 아니라, 그 뒤에 스텝이 궁금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니는 헬스장에 제안서를 낼 때도, 돈도 돈이지만 그냥 스스로 궁금했던 거 같습니다. 회사에서 하던 거, 여기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하면 통할까?


대체 몇천억 다루는 회사에서는 마케팅에 답이 없다고 하는데, 몇백만원 몇천만원 다루는 곳에서는 왜 답이 있다고 할까?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긴 하는 것이며, 존재한다면 내가 그걸 모르고 싶지는 않고, 당신들보다 늦게 그 정답에 도달하고 싶지는 않다. 이 정도 마인드랄까요.


4. 이렇게 생각하면 저는 마케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일을 직접 해보고 남을 이겨먹고 싶은 그런 소인배일지도 모르겠네요. 딱 정해준다는 그런 사람이나, 이것만 하면 된다는 사람이나, 매주 마케팅 트렌드를 발행하는 그런 사람은 못되니까요.


1. 시간의 밀도


20대 중반, 투자로 경제적 자유를 이룬 군대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말한 게 저를 아직도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웬만한 애들과 나는 사는 시간의 밀도가 달라"


고작 20대 중반에 뭘 그렇게 잘난 척이냐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맞는 거 같더라구요. 20대 초반에 군대에서 만나 흡연실에서 밤새도록 얘기를 할 때는 같은 빡빡머리였는데, 5년이 지난 후 누구는 학점 2.5 대학생이고 누구는 엔터회사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되어있었으니까요.


맨 처음 소개한 고등학생, 대학생 사업가들도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살고 계시겠죠.


헬스장에 제안서를 보내고, 꽤 괜찮은 한 명의 직업인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이후에 별로 변한 게 없습니다. 그 친구가 이제 비범한 미래를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저는 아직 일개 범부일 뿐이죠.


2. 상대주의


그래서 꽤 오래 상대주의에 빠졌던 거 같습니다. 저 인간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저 사람도 저렇게 사는 이유가 있겠지. 저 사람은 저렇게 잘났지만, 나는 나대로 나아지고 있지. 이 정도요.

물론 이런 생각도 중간에 한 번 깨져서 스스로 이상의 기준을 어느 정도 세워야겠다고는 결심하게 됐습니다. 목표를 세운다고 다 이루진 않지만,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게 인간이거든요.


높은 목표를 세우고 못 이루는 게 두려워 나 정도면 괜찮다고 자위하며 살았는데, 목표를 못 이뤘을 때는 상대주의로 살고, 성과가 낮을 때는 목표를 빡세게 잡고. 이렇게 스위칭하며 살면 되지 않을까요?


3. 밀도의 상대성


어떤 단계든 이뤄내면 유지는 생각보다 쉽습니다.


운동에는 머슬메모리라는 개념도 있고, 언어도 매일 10분씩 1년 하는 것보다 온갖 환경을 통제하고 한 달 바짝 하는 게 효과적이죠. 일도 한 번 열심히 해 본 사람은 나중에 본업 모드로 돌아가기 쉽지 않을까요..?


그래서 누가 보면 빡세다고 하는 이 일상도 그럭저럭 지낼만 합니다. 애초에 스스로를 대견하다거나, 충분한 성과를 이뤘다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기도 해서요. 마케팅이나, 비즈니스 어쩌구 관련 책만 더럽게 많이 읽는 이 반 년간의 밀도도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익숙해진 이 밀도를 또 꽉꽉 눌러채우기 위해, 다른 산업, 업종의 마케팅을 해보고 싶었던 건데 일단은 운동으로 갈음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분야에서 또 초보자가 됐다는 긴장감과 호기심, 약간의 디깅 등이 합쳐져 꽤 큰 리프레쉬가 되기도 하구요.


일은 적성, 거리, 동료, 복지, 문화 등이 합쳐져 만족도를 결정한다는데요, 현재까지는 꽤 만족스럽습니다. 솔직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벌써 8개월 가까이 됐는데요, 1년도 금방 채우지 않을까 싶네요.


루팡하는 시간이 있으면서도 하루하루가 잘 안 가고, 컨펌만 기다렸던 그런 날들.

알지도 못하는데 자꾸 해내라는 그런 날들.


이런 온갖 밀도를 넘나드는 날들을 보냈기에 지금의 적당한 밀도와 긴장감의 하루하루를 즐기며 보낼 수 있는 거 같습니다.


또 비정기적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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