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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Dec 17. 2018

<툴리>는 공포 영화입니다

<툴리>를 보고

※ 이 글은 스포일러로 시작합니다    


“툴리요.” 드류(론 리빙스턴)가 병원 수납 창구 직원에게 마를로(샤를리즈 테론)의 미들 네임을 별 뜻 없이 대답했을 때 나는 놀란 마음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마를로가 불러낸 상상 속 인물이었다는 사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반전은 고되지만 따듯함을 잃지 않았던 이 영화를 서늘한 공포 영화로 탈바꿈시킨다. 고강도 육아의 공포를 뜻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툴리라는 마법사가 없었던 거라면 그 기적 같은 모든 일을 해낸 건 마를로였다는 점이 섬뜩했다.      


출처 = 씨네21 <툴리>


이 영화는 공포 영화다     

영화에서 툴리는 아기가 아닌 마를로를 돌봐주러 왔다고 밝힌 자신의 포부가 결코 인사치레가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요람에 누워있던 마를로의 갓난아이 미아를 살포시 들어 올려 반들반들한 뒤통수를 감싸 안고서는 마를로에게 어서 침대로 가라고 재촉한다.      


마를로에게 가장 필요했던 잠을 제공한 야간 보모는 이어서 청소와 주방 도우미로도 활약한다.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일어난 마를로는 정리정돈은 물론 6년 된 마룻바닥의 얼룩까지 지워져 있는 러브 하우스와 마주한다. 툴리에게 자신을 둘째 아들 조나의 학교에 컵케이크 하나 만들어가지 못하는 못난 엄마라고 고백한 다음 날 아침에는 식탁에 떡하니 올려져 있는 알록달록한 컵케이크를 발견한다.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 후로부터 마를로는 다시 정상적으로 삶을 굴리기 시작한다. 엄마의 변화는 자연스레 자식과 남편의 생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마를로의 집은 홈 스윗 홈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 집은 모래 위의 성. 가정의 평화는 마를로가 젊고 에너지 넘치는 20대 여성과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었다. 툴리의 자리에는 24시간 무수면 노동 중인 마를로만이 서 있었다. 마를로 혼자 즐겁게 컵케이크를 만들고 청소를 하는 진실의 컷들을 보면서 나는 한없이 서늘해졌다.              


출처 = 씨네21 <툴리>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오는 일이 무동력 에베레스트 등반 못지않게 힘든 일일 수가 있고요."
「경애의 마음」, 김금희.   


마를로가 그렇다. 누군가는 그게 ‘일’이냐고 반문할 만한 사소하고 반복적인 행위들. 침대에서 일어나 양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차 운전석 안에 몸을 욱여넣는 마를로의 모습은 천근만근 그 자체다. 


포기하면 그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도망쳐버리는 방법이 그녀의 선택지에 분명 있었다. 식사를 차리지 않고 학교 선생님과의 상담을 하러 가지 않고 아이가 특이한 성격이든 예민한 나이이든 무감하게 생각하는 거다. 세상에는 그런 부모도 있다.      


그러나 마를로는 행동한다. 저녁 메뉴로 냉동 피자를 내놓고 상담 시간을 엉망으로 만들고 자식들에게 기계적으로 대답하더라도 그녀는 자신이 엄마로서 해야 할 일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또 다른 나의 지지와 보살핌을 받으면서까지 매일 몸을 움직인다. 마를로란 사람의 위엄은 거기에서 나온다.      


출처 = 씨네21 <툴리>


이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부엌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재료 손질을 하는 마를로 옆에 드류가 선다. 드류는 마를로의 이어폰 한쪽을 자신의 귀에 꽂고 익숙한 듯 손질을 돕는다. 평온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내심 불안하다. 마를로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정말 드류가 맞을까. 


잊지 말자. 이 영화는 공포 영화다. 



[chaeyooe_cinema]

툴리 Tully

감독 제임스 라이트맨 Jason Reitman



매일 포기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만든 잔혹한 가정의 평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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