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eyooe Dec 20. 2018

당신만의 추억이 나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로마>를 보고



적수 없는 그녀

알폰소 쿠아론의 신작 <로마>는 <그래비티>를 마무리한 후 다음 영화는 좀 더 단순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겠다던 자신의 다짐을 지킨 결과물이다. <로마>에는 그가 1970년대 초 멕시코시티의 한 도시 로마에서 3년간 살았던 개인적 추억이 담겨있다.         


감독은 이야기의 무대를 가장 광대한 공간에서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위치 변경하고 거기에 스타가 아닌 신인을 주인공으로 세운다. <그래비티>에서 샌드라 불럭과 조지 클루니를 우주 재난 상황에 빠뜨렸던 그가 5년 뒤 <로마>에서는 연기 경험이 전혀 없었던 멕시코의 한 시골 마을 여성을 자신의 고향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출처 = IMDB <ROMA>


영화에서 로마 집과 거리를 부단히 뛰어다니는 건 감독이 투영된 인물 페페(마르코 그라프)가 아닌 그의 가족의 입주 가정부 클레어(얄리트사 아파리시오)다. 쿠아론은 일찍이 자신이 이야깃감으로는 클레어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걸까. 그는 자신의 추억담에서 어디까지나 주변 인물로 머물기를 자처한다.      


자연스레 이 영화는 격동의 시공간에서 노동과 연애를 하고 임신과 출산을 겪은 한 여성의 이야기가 된다. 쿠아론은 클레어의 3년을 천천히 정성 들여 스크린에 우려내 깊이 있는 영화를 관객에게 내놓는다.     



출처 = IMDB <ROMA>
출처 = IMDB <Boyhood>


<로마>와 <보이후드>는 닮았다

어쩐지 나는 이 영화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2014)가 닮았다고 느꼈다. 닮은꼴 영화로 나란히 두기에 두 영화의 이야기 블록은 끼우면 꼭 맞을 만큼 강조되는 부분이 정반대다. <로마>는 임신과 출산처럼 한 사람의 인생 그래프를 그리면 꼭짓점이 될 만한 사건들과 시대적 참극이 맞물리며 서사가 진행된다.      


반면 <보이후드>는 일상을 강조한다. 영화는 <로마>라면 건져 올렸을 사건들을 뭍 아래 깊숙이 묻어둔다.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의 12년을 채우는 건 이삿날 그동안 살았던 집 마당과 나무에 작별 인사를 건네고 생일 날 아빠가 직접 모으고 편집한 음악 CD를 받았던 순간들이다.  

   

이 두 영화가 닮았다고 느낀 지점이 영화의 내부가 아니라면 어디일까. 머릿속으로 축소 나사를 천천히 돌려 영화 바깥으로 빠져나오니 그곳에는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는 두 감독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알폰소 쿠아론과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에 대한 태도가 같다고 느낀 거다.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관객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 그게 오직 한 사람만의 경험담이든 무수한 점과 같은 이야기든 말이다.      

  


나는 가끔 내가 없는 엄마를 생각해


그래서일까.
<로마>를 보고 나니
나도 카메라를 들고 싶어졌다.
나를 길러준 나의 엄마를 향해.

그동안 나는 엄마에게 엄마가 아니었던 시절에 관해 물어보길 주저했다. 엄마가 혹여나 “네가 없었을 때가 더 나았어.”라든지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라고 말해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의 행복을 좀먹는 존재라는 추정을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사실은 내가 알고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엄마의 과거 중 하나다. 작년 추석 연휴 하늘공원에 갔던 인천의 우리 세 모녀는 서울시 따릉이 정책에 감탄했다. 약간 과장을 보태어 말하자면 공원 가는 길에는 우리를 포함한 뚜벅이족 반 따릉이족 반이었다.      


자신이 안전 운전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일찍 깨우친 나와 동생은 우리를 앞지르는 그들을 보며 그저 도보 속도보다 빠름에 부러워했다. 그리고 별 뜻 없이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자전거 탈 줄 알아?”

“당연하지. 엄마 시골에서는 만날 자전거 타고 학교 다녔어.”     



금시초문이었다. 엄마가 자전거를?

나는 교복 치마를 입고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냅다 페달을 밟아 달리는 단발머리 소녀를 떠올렸다. 그렇게 매일 자전거를 타고 학교와 시장과 외할머니의 일터인 밭을 쏘다니던 소녀는 이제 매주 토요일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번갈아 가며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는 노인에 가까워진 중년이 되었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은 세상 많은 딸 중 하나다. 아직도 가족들 먹인다고 드럼통만 한 냄비에 사골을 끓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자식의 불행을 알게 될 때면 늘 당신 탓하는 엄마가 나는 고마우면서도 밉다. 그 짧은 주말을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다 보냈으면서도 잘 쉬었다 간다며 출근 가방 안을 정리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다혜 작가가 쓴 몇 문장을 되뇐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고, 나를 낳지 않았다면 더 행복하게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다.’ ,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언젠가 나는 나의 엄마에 대한 영화를 찍고 싶다. 오프닝 시퀀스는 이미 정했다. 자전거 탄 소녀. (여기까지 수고스레 읽어준 독자라면 단번에 무엇인지 알 거라 믿는다)


훌륭한 영화는 관객의 인생에도 영향을 미친다.

<로마>는 바로 그런 영화다.




[chaeyooe_cinema]

로마 ROMA

감독 알폰소 쿠아론 Alfonso Cuarón



나를 길러준 사람에게도 카메라를 들고 싶게 만드는 한 사람의 형형한 기억.
[★★★★★]



매거진의 이전글 <툴리>는 공포 영화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