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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Dec 25. 2018

송강호의 얼굴이 지루하게 느껴지다니

<마약왕>을 보고


지난 20년간 한국 영화의 얼굴은 송강호였다. 2000년 <반칙왕>의 임대호부터 2017년 <택시 운전사>의 김만섭까지 그의 얼굴에는 오래 쳐다봐도 닳지 않는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 <마약왕>에서 그가 보여준 이두삼이란 얼굴은 지루했다. 송강호에게 이런 느낌을 받는 날이 올 거라 예상한 적이 없었던 나는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한참을 당황스러워했다. 이 글은 내가 느낀 감정의 원인을 찾는 일종의 보고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마약왕>


약 파는 사람이 약을 하면

<마약왕>이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송강호가 분한 이두삼은 1970년대 초 부산에서 대규모 마약 유통업을 진두지휘한 거두다. 진즉에 밀수하는 게 굻어 죽는 것보다는 났다고 판단한 금은방 주인장은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먼저 찾아가 동업자로 꾀어 자기 사단부터 꾸린다.      


이두삼은 앞으로 우리나라가 살길은 수출뿐이라는 신념 아래 사과 상자에 돈을 숨기는 정치인 수법과 유사한 방식으로 히로뽕을 일본에 역수출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이후 이환수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해 애국한다는 사람들은 죄다 가입해있을 것 같은 새마을지도자협회라는 단체에서 표창을 받는 등 나라 발전에 이바지한 식품유통업자로까지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는 약 파는 사람은 약하면 안 된다는 업계 단 하나의 룰을 어겨 타락 선고를 받는다. 설상가상으로 10·26 사건(1976)으로 박정희 시대가 끝나자 그의 뒷배를 봐주던 비리 공무원들까지 그를 저버린다. 돈 냄새를 풍기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던 이두삼은 결국 자신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아가며 자기만의 성에서 감옥살이에 들어간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마약왕>


이것은 추락이 아니다

우민호 감독은 <마약왕>이 철저히 이두삼의 독무대이길 바랐던 것처럼 보인다.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정점에 있던 이두삼이 결국 추락하는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전작(<내부자들>)과 같은 대결 구도를 일부러 피했다고 설명했다.

(씨네21 인터뷰 : <마약왕> 우민호 감독 - 파멸의 인물을 통해 보여준 부패의 시대)     


그러나 극 중에서 감독이 말한 추락의 이미지는 흐리멍덩하다. 중반까지 영화는 이두삼에게 장소와 조력자를 화끈하게 제공해 그를 까마득한 정상에 올려놓고는 돌연 지원을 멈춘다. 그와 관계 맺은 캐릭터들은 전력을 다하기도 전에 산 중턱 어딘가에서 차례로 행방불명된다. 후반부에 홀로 남아 평지 같은 내리막길을 걸어 종착하는 이두삼에게서 추락의 카타르시스는 찾을 수 없다.     


일찍이 <인사이드 아웃>을 통해 슬픔이 있어야 기쁨도 존재한다는 걸 배웠지만 송강호라는 천군만마를 얻은 감독에게 이 진리는 무효했나 보다. 앞선 인터뷰에서 감독은 10년 가까이 이어지는 이두삼의 일대기를 복잡하게 꼬지 않고 단순하게 가기로 한 데에는 송강호가 잘해줄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심 가지가 뻗어 나가도록 무리하게 주변 가지들을 제거한 감독의 선택은 중반부 이후 영화가 급격하게 활력을 잃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마약왕>


그들은 누구도 아니다

조정석이 분한 검사 김인구는 이두삼의 적수라기보다는 제삼자에 가깝다. 감독은 김인구에게 영화 전체를 조망하는 내레이터 역할을 맡겨 그가 검사로서 가진 미치도록 잡고 싶다는 욕망이 이두삼의 그것만큼 커지는 것을 막는다. 극 중에서 김인구와 이두삼이 쫓고 쫓기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자들>에서 검사 우장훈(조승우)와 깡패 안상구(이병헌) 사이에서 흐르던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마약왕>


이두삼의 아내 성숙경과 연인인 로비스트 김정아는 김소진과 배두나라는 펄떡이는 매력을 가진 배우가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두삼이 마약왕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역할에 그친다. 특히 이두삼이 김정아의 관계를 알게 된 뒤 울부짖는 성숙경을 뒤로 한 채 음악학원을 빠져나올 때와 김인구에게 잡힌 자신을 빼내고 차로 데리러 온 김정아를 길바닥에 내리게 할 때 짓는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잡히지 않는다. 나는 그의 표정에서 영화가 이 두 캐릭터를 얼마나 무용하게 여기는지를 읽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밀양>


리액션의 대가에게 무슨 짓을

이제는 송강호가 대중에게 <변호인>에서 실핏줄이 터질 듯 민주주의를 외치던 송우석 변호사로 각인되어서일까. 기실 그는 누구보다 리액션이 훌륭한 배우다. 나는 지금도 송강호 연기의 정수는 영화 <밀양>(2007)에 모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전도연이 등에서까지 절망이 느껴질 정도로 연기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불덩이 같은 연기를 전부 받아낸 송강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즉 송강호는 <밀양>의 영문 제목인 Secret Sunshine, 즉 비밀의 햇볕처럼 표나지 않게 상대방을 빛나게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도 발하는 연기자다.     

  

그러나 <마약왕>은 송강호가 리액션 할 기회를 박탈한다. 후반부에 타락한 왕의 용포와도 같은 긴 코트를 걸치고 선보이는 그의 마약 중독자 연기와 총탄이 난무하는 이두삼 체포 작전은 수렴 없이 발산만 하다가 사그라진다. 1980년 부산 저택 시퀀스 전부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아닌 잔여물처럼 느껴진 이유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마약왕>


결과 보고를 해야 할 차례다. <마약왕>에서 송강호의 얼굴이 지루했던 까닭은 그의 얼굴에서 추락한 자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 캐릭터들은 그의 리액션 상대가 되어주지 못한 채 쓰고 버려진다. 지지부진한 전개로 컨디션 유지에 실패한 관람자는 대배우의 화려한 쇼를 보면서도 극장의 불이 켜지길 바란다. 앞으로 내게 이 영화는 송강호라는 만병통치약도 효과가 없는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chaeyooe_cinema]

마약왕 THE DRUG KING

감독 우민호



중장부터 떨어지는 약발.
송강호라는 만병통치약을 써도 살아나지 않는 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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