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온 피트>를 보고
보면 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지는 얼굴이 있다. 혼자 크는 아이의 얼굴이다. 떠올리면 <아무도 모른다>(2004)의 아키라, <자전거 탄 소년>(2011)의 시릴, <도희야>(2014)의 도희 그리고 <마더>(2018, tvN)의 혜나의 얼굴이 된다.
곡절 끝에 자신을 보호해줄 어른과 장소를 상실한 아이는 그 경험 때문에 또래보다 일찍 철이 든다. 보호받을 기회가 찾아와도 쉬이 마음을 놓지 않는다. 이전보다 더 열심히 손과 발을 움직이고 울고 싶어도 참는다. 혹여나 보호자가 자기를 성가시다 느끼면 버릴 거라는 불안 때문이다.
<린 온 피트>의 찰리(찰리 플러머)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보호자가 돼줄 것도, 돼줄 수도 없으면서 그저 모든 걸 책임지고 싶어졌다.
달리다가 결국 걷게 되는 소년
찰리는 걷기보다 달리기를 즐기는 열여덟 살 소년이다. 아빠 레이(트래비스 핌멜)의 일 때문에 포틀랜드로 이사 온 찰리가 짐 정리를 대충 마치고 하는 일은 가볍게 뛰며 집 근처를 둘러보는 일이다. 탐색을 마친 소년이 집으로 돌아오면 아빠의 애인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웠던 마지 고모(앨리슨 엘리엇)는 아빠와 다툰 이후로 연락이 끊긴 상태다.
주로 혼자 시간을 보내던 찰리가 경주마 피트를 만나게 되는 건 우연이다. 아침 조깅을 하던 중 얼떨결에 말 조련사 델(스티브 부세미)의 일을 돕게 된 찰리는 말은 잘 모르지만 하룻밤 자고 와도 부모님께 혼나지 않으며 침낭도 있다는 이유로 델의 조수가 된다.
찰리는 일에 용돈 벌이 이상의 즐거움을 느낀다. 새벽 밤 같은 눈망울을 가진 말을 바라보고 일해서 번 돈으로 양손 가득 먹을 걸 사 들고 집으로 향하는 소년의 표정에는 그늘이 없다. 그러나 영화 시작 50분 안에 벌어지는 아빠의 사고와 죽음은 이 일을 곧 생존 수단으로 바꿔버린다.
그 와중에 피트는 경기에서 우승하지 못해 사실상 죽음이 예고된 멕시코로 팔릴 위기에 놓이고 그런 피트에게서 찰리는 자신을 본다. 결국 찰리는 자신과 처지인 피트를 몰래 데리고 나와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줄 마지 고모를 찾아 기약도 없이 허허벌판을 걷게 된다.
스포츠 영화가 아니다
<린 온 피트>라는 제목과 찰리와 피트의 투 샷으로 완성된 포스터는 이 영화가 사람만큼이나 말에도 주목할 거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린 온 피트>의 카메라가 집중하는 대상은 나는 네가 지킨다고 말하는 한 소년뿐이다. 스포츠 영화에서 볼 법한 경쟁의 카타르시스가 이 영화에 없는 이유다.
비윤리적인 조련 방식과 쓸모가 다 한 경주마의 비애 같은 건 델과 기수 보니(클로에 세비니)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 정도다. 후반부에 차에 치여 죽어가는 피트에게 카메라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대신 사건 수습 차 찾아온 경찰관으로부터 달아나는 찰리가 암흑 속의 점이 될 때까지 배웅한다. 이 영화의 관심이 동지를 잃어 슬픈 소년이 아니라 이제 완벽히 혼자가 된 소년의 남은 싸움에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혹여나 이 영화가 동물을 등한시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두렵다. 접근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영화는 같은 처지의 찰리와 피트 모두를 가엽게 여긴다. 강조한다. <린 온 피트>는 스포츠 영화가 아니다.
그 소년의 슬픔은 어디에서
크고 작은 범죄와 폭력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마지 고모의 품 안에 안긴 찰리를 보고 나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여전히 기쁨이 당도하지 않은 찰리의 표정 때문이다. 고모의 집 안에서 고모가 해준 음식을 먹으며 찰리가 직접 밝히는 그 이유는 가슴을 치게 한다.
“고모 남편이 괜찮다고 하면, 잠시만 여기서 지내도 돼요?”
조건 없는 보호를 받아보지 못한 찰리에게는 거절당할 각오부터 하는 게 먼저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스스로 제약을 붙여서라도 거절당하고 싶지 않다.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잠깐의 침묵 끝에 고모는 판결을 내리듯 대답한다.
“너 안 보낼 거야. 그리고 남편 같은 건 이제 없어.”
잠 못 이루는 밤, 한 번 더 확인받고 싶은 찰리는 고모의 침실 방문을 두드린다. 침대에 걸터앉은 피트는 고모에게 여기서 살게 되면 학교에 다녀도 되는지, 풋볼을 다시 해도 되는지, 혹시나 감옥에 가더라도 여기로 돌아와도 되냐고 찬찬히 묻는다.
차마 눈을 마주치고 못 한 채 말하는 조카에게 고모는 유난스러운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게 법이고 상식이라며 찰리의 물음표를 일일이 마침표로 바꿔준다. 마침내 찰리는 고모의 어깨에 머리를 박듯이 안겨 운다.
그러나 그것은 안도에서 비롯된 눈물이 아니다. 반복해 꾸는 꿈에서 물에 빠진 아빠와 피트를 구하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고 찰리는 고백한다. 나는 이 소년의 슬픔이 보호받지 못함에서 아니라 보호하지 못함에서 왔다는 걸 알고 또다시 무너진다.
영화는 포옹에서 곧바로 달리기로 넘어간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뛰는 소년의 뒷모습에선 제법 자란 티가 난다. 익숙한 길인 듯 자연스럽게 뛰다가 걸음을 멈춘 소년이 마침내 얼굴을 보여줬을 때 비로소 나는 미뤄왔던 안도의 숨을 내뱉는다. 청년의 얼굴을 한 찰리를 보며 나는 오래전 읽은 이승우의 한 문장을 떠올린다.
그는 조건과 이유 없이 보호받아야 한다. 유일한 조건과 이유는 그가 보호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소돔의 하룻밤」)
[chaeyooe_cinema]
린 온 피트 Lean on Pete
감독 앤드류 헤이 Andrew Haigh
보호자와 안식처를 스스로 구해야만 하는 아이.
뜨겁게 안아 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