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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Jan 25. 2019

힐링 푸드 영화가 아니다

<일일시호일>을 보고


출처 = 소소한 패션가, Chloe Sevigny by Annabel Mehran for The Ingenue Magazine #3 Spring/Summer


종합 운동은 계속 돼야한다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반복해서 하는 것이 있다. 딱히 명명할 수 없어 종합 운동이라 부르는 것이다. 매일 스트레칭, 팔굽혀펴기 30개, 윗몸일으키기 40개, 요가를 한다. 보통 저녁 뉴스와 함께 시작해 오후 10시면 끝난다.      


애초에 목적을 갖고 벌인 일이 아니기에 언제부터 하게 된 건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들인 시간에 비하면 딱히 몸이 좋아진 것 같지도 않다. 예나 지금이나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다가 담이 오기 부지기수고,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으면 얼마 되지 않아 허리가 아프다.      


달라진 거라고는 무릎을 굽히지 않은 채 상체만 숙여서 땅에 떨어진 것들을 주울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해졌다는 것과 한 발로 선 채로 양말을 신을 수 있을 정도로 중심을 잘 잡게 됐다는 것 정도다. 하나 더 있긴 하다. 가끔 기인 같은 자세를 선보여 지인을 놀라게 한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운동을 한다. 밖에서 엉망진창인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들어와 팔굽혀펴기를 하고 다리를 찢다 보면 몸은 고통스러울지언정 그제야 본래의 나로 복귀하는 기분이다.


오모리 타츠시가 연출한 <일일시호일>을 보고 나니 새삼 나의 종합 운동이 다르게 다가왔다. 어쩌면 나는 이 무용한 것에 의존해 간신히 내 삶을 지탱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출처 = 씨네21, <일일시호일>


중요한 건 형식

영화 <일일시호일>의 노리코(쿠로키 하루)는 평생을 걸 무언가를 찾지 못해 불안한 20살 대학생이다. 그 나이에 할 법한 고민이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노리코 옆에는 구만 리 앞길의 인생 계획이 확실한 사촌 미치코(타베 미카코)가 있다.


덜렁대다 물 컵을 엎지르는 노리코에게 매번 있었던 일인 것처럼 닦을 것을 들고 모이는 가족들 사이에서 그녀는 묘한 자괴감을 느낀다.     


엄마의 권유로 미치코와 함께 시작한 다도 수업에서 노리코가 뜻밖의 재능을 발견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노리코는 첫날 종이접기 상급반에 버금가는 실력으로 차 수건 접는 법부터 시현하는 다케타(키키 키린) 선생님을 따라 하기 바쁘다.       


출처 = 씨네21, <일일시호일>


이후 토요일마다 이뤄지는 다케다 클래스에서 고운 빛깔의 차와 오감을 자극하는 다과는 단계 일부일 뿐이다. 이 영화를 찍기 위해 다도를 직접 배웠다는 감독은 자신도 거쳤다는 듯 차 예절과 테크닉을 차례차례 몸에 익혀가는 수련자의 서툰 손과 발에 집중한다.     

 

다실(茶室)에 어느 쪽 발부터 들여야 하는지 찻솔은 어떤 강도로 돌려야 하는지 아득하지만 두 달 후 노리코는 순서에 맞춰 저절로 움직이는 자신의 손에 성취감을 느낀다. 다도는 배우기보다는 익숙해지는 게 중요하다는 스승의 지침이 절로 들어맞는 순간이다.


영화는 스무살의 노리코에서 관찰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한 사람의 인생을 아는 데에도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는 듯 서른셋, 마흔다섯의 노리코까지 보여준 다음에야 마침표를 찍는다.


출처 = 씨네21, <일일시호일>


불변하는 것이 주는 위안

다도는 세상사 다 변해도 변하지 않고 노리코의 삶을 든든히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바라던 출판사 취직 시험에 불합격한 뒤 프리랜서 작가 생활을 시작하고 결혼 두 달 전에 연인이 배신하고 부모 집에서 독립할 때도 노리코는 일주일에 한 번 스승의 집에 찾아간다. 밥 한 끼 제대로 같이하지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던 노리코가 위안을 얻는 순간 또한 비가 쏟아지던 다도 시간이다.      


그렇다고 노리코가 기를 써서 다도를 붙잡는 건 아니다. 다도가 싫다 하면서도 수업에 다녀오겠다고 엄마에게 인사하던 스무 살 그때처럼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일을 이어간다. 다도란 의미는 몰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다케타의 말처럼 말이다. 앞으로도 그녀는 다도를 부표 삼아 파도치듯 일렁이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노리코가 걱정되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작가 손보미의 소설 「디어 랄프로렌」,에 등장하는 미츠오 기쿠는 대학교수다. 그러나 그의 제자이자 주인공인 종수는 기쿠라는 인간을 다음의 문장으로 정의한다.


그는 그저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었다. 바로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다시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갈 동력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그제야 나는 깨닫게 된 것이다.


노리코 역시 그저 다도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 과정을 통해 그녀는 휘청이는 삶을 끝까지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다. 나도 다르지 않다. 그저 운동하는 사람. 오늘 밤에도 나는 운동하러 간다.        


  


[chaeyooe_cinema]    

일일시호일 日日是好日

감독 오모리 타츠시 大森立嗣 



삶도 곧 저마다의 형식을 반복하며 완성해 나가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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