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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Feb 10. 2019

경찰일 필요 없다

<뺑반>을 보고



보고 나면 기분 좋은 배신감이 드는 영화가 있다. 권투 경기의 짜릿함을 기대했던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는 생의 심오함을, 밥 딜런 음악 가이드쯤 될 거라 여겼던 <아임 낫 데어>(2007)는 무형한 예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 <뺑반>


반면 <뺑반>은 기분 나쁜 배신감이 든 영화였다. 날쌘 슈퍼히어로가 나오는 영화의 포스터를 연상케 하는 이 영화의 포스터 때문에 내가 잘못된 기대를 품은 건지도 모른다. 영화 내내 쫄깃함과 쾌감으로 땀이 날 줄 알았던 양 손바닥은 중반부터 메말랐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이 영화가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기만을 기다렸다.       


(이 글에서 언급되는 ‘인터뷰’는 「씨네21」에서 진행한 ‘[설 연휴 영화③] <뺑반> 한준희 감독 - 카체이싱이라는 장르, 경찰이라는 리얼리티’입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베테랑>, <뺑반>


아는 사람 조태오

그러니까 초면 같지가 않았다. 젊은 놈이 자신과 같은 스포츠카를 몬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껴 그놈의 차가 아닌 자신의 차를 골프채로 휘갈기던 정재철(조정석) 말이다. 그가 또 다른 젊은 놈에게 헬멧을 씌우고 관자놀이 부근에 작동하는 드릴을 갖다 댔을 때야 나는 기억해냈다.     

 

조태오. 그렇다. 동물적이면서도 애 같은 성격, 불안한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 부모의 애정이 동반되지 않았던 과거를 잊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재철은 <베테랑>(2015)의 그를 닮았다. 2015년 조태오가 한국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 ‘젊은 재벌 사이코패스 캐릭터’의 무한복제시대가 열렸다. 이는 곧 <뺑반>이 매력적인 악역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는 이유가 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정재철을 복합적이고 아이러니한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고 설명한 바 있지만 내 눈에는 그가 단순하고 평면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정재철은 수많은 조태오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뺑반>


아는 서사 가족 서사

나는 <뺑반>이 경찰이라는 직업과 경찰관이라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감독의 말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뺑반>은 가족영화이기 때문이다. 중반부에 서민재 아버지(이성민)가 등장하면서부터 이 영화는 경찰영화의 외피를 벗어버린다. 초반부에 은시연(공효진)이 쥐고 있던 메인 플롯의 바통은 서민재(류준열)에게로 넘어가고, 주 무대도 뺑반의 반지하 사무실에서 부자(父子)의 카센터와 집으로 전환된다.      


그 결과 은시연과 서민재가 반드시 뺑소니 전담반이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이들이 정재철을 반드시 잡겠다고 마음먹게 된 결정적 동인은 그가 낸 사고로 서민재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그가 뺑소니 사건의 범인이란 사실은 모래알이 된다.


이제 영화는 서민재에게 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설명하는데 공들인다. 정재철이 절대 죽여서는 안 되는 인물을 죽였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인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서민재 부자의 과거는 서민재의 가족 같은 인물들의 입을 통해 구구절절 설명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뺑반>


아버지라 부르는 남자는 사실 친아버지가 아니며, 형사였던 그가 폭주족의 일원이었던 당시 김민재를 잡다가 한쪽 다리를 다쳐 일을 그만두었고, 그럼에도 혼자인 김민재의 보호자를 자처했다는 대서사시 말이다. 화룡점정으로 서민재는 은시연에게 받은 걸 갚으면서 살기 위해 경찰이란 직업을 선택했다고 고백한다. 상세히 풀어놓은 과거를 발판으로 영화는 수사가 아닌 아비 잃은 아들의 처절한 복수에 집중한다.     

 

<뺑반>이 이토록 차 나오는 진지한 영화가 된 데에는 장르적인 요소는 양념에 불과하다는 감독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양념이 중요한 영화다. 신선한 액션과 팀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는 소재(뺑소니 전담반)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 맛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손님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뺑반>은 사람이란 명목 아래 진부한 가족 서사를 답습한다. 그리고 끝끝내 경찰영화의 서킷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출처 = TVING


경찰이 아니어도

드라마 <라이브>(2018)에서 한정오(정유미) 순경은 동기 염상수(이광수)에게 사명감이 어떤 거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대답한다.      


오늘 같은 일 다신 안 보고 싶은 마음.
내가 기껏 아무것도 잘 모르는 시보지만 범인 잡는데 조금이라도 돕고 싶은 거.


경찰이라는 직업에 초점을 맞췄다는 <뺑반>에는 이런 고민이 담겨있지 않다. 이 영화 속 경찰이 나쁜 놈 잡는 동력은 사명감이 아닌 가족애다.


서민재가 경찰인 이유는 아버지를 죽게 만든 사람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순간의 희열을 위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다른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익숙한 캐릭터와 진부한 서사를 태운 채 안전 운전하는 이 영화의 주행이 안타깝다.      




[chaeyooe_cinema]    

뺑반 Hit-and-Run Squad 

감독 한준희



또다시 조태오('베테랑')를 품은 악당 캐릭터와
'가족의 이름으로' 서사로 무너지는 한국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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