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뺑반>을 보고
보고 나면 기분 좋은 배신감이 드는 영화가 있다. 권투 경기의 짜릿함을 기대했던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는 생의 심오함을, 밥 딜런 음악 가이드쯤 될 거라 여겼던 <아임 낫 데어>(2007)는 무형한 예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반면 <뺑반>은 기분 나쁜 배신감이 든 영화였다. 날쌘 슈퍼히어로가 나오는 영화의 포스터를 연상케 하는 이 영화의 포스터 때문에 내가 잘못된 기대를 품은 건지도 모른다. 영화 내내 쫄깃함과 쾌감으로 땀이 날 줄 알았던 양 손바닥은 중반부터 메말랐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이 영화가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기만을 기다렸다.
(이 글에서 언급되는 ‘인터뷰’는 「씨네21」에서 진행한 ‘[설 연휴 영화③] <뺑반> 한준희 감독 - 카체이싱이라는 장르, 경찰이라는 리얼리티’입니다.)
아는 사람 조태오
그러니까 초면 같지가 않았다. 젊은 놈이 자신과 같은 스포츠카를 몬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껴 그놈의 차가 아닌 자신의 차를 골프채로 휘갈기던 정재철(조정석) 말이다. 그가 또 다른 젊은 놈에게 헬멧을 씌우고 관자놀이 부근에 작동하는 드릴을 갖다 댔을 때야 나는 기억해냈다.
조태오. 그렇다. 동물적이면서도 애 같은 성격, 불안한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 부모의 애정이 동반되지 않았던 과거를 잊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재철은 <베테랑>(2015)의 그를 닮았다. 2015년 조태오가 한국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 ‘젊은 재벌 사이코패스 캐릭터’의 무한복제시대가 열렸다. 이는 곧 <뺑반>이 매력적인 악역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는 이유가 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정재철을 복합적이고 아이러니한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고 설명한 바 있지만 내 눈에는 그가 단순하고 평면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정재철은 수많은 조태오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는 서사 가족 서사
나는 <뺑반>이 경찰이라는 직업과 경찰관이라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감독의 말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뺑반>은 가족영화이기 때문이다. 중반부에 서민재 아버지(이성민)가 등장하면서부터 이 영화는 경찰영화의 외피를 벗어버린다. 초반부에 은시연(공효진)이 쥐고 있던 메인 플롯의 바통은 서민재(류준열)에게로 넘어가고, 주 무대도 뺑반의 반지하 사무실에서 부자(父子)의 카센터와 집으로 전환된다.
그 결과 은시연과 서민재가 반드시 뺑소니 전담반이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이들이 정재철을 반드시 잡겠다고 마음먹게 된 결정적 동인은 그가 낸 사고로 서민재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그가 뺑소니 사건의 범인이란 사실은 모래알이 된다.
이제 영화는 서민재에게 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설명하는데 공들인다. 정재철이 절대 죽여서는 안 되는 인물을 죽였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인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서민재 부자의 과거는 서민재의 가족 같은 인물들의 입을 통해 구구절절 설명된다.
아버지라 부르는 남자는 사실 친아버지가 아니며, 형사였던 그가 폭주족의 일원이었던 당시 김민재를 잡다가 한쪽 다리를 다쳐 일을 그만두었고, 그럼에도 혼자인 김민재의 보호자를 자처했다는 대서사시 말이다. 화룡점정으로 서민재는 은시연에게 받은 걸 갚으면서 살기 위해 경찰이란 직업을 선택했다고 고백한다. 상세히 풀어놓은 과거를 발판으로 영화는 수사가 아닌 아비 잃은 아들의 처절한 복수에 집중한다.
<뺑반>이 이토록 차 나오는 진지한 영화가 된 데에는 장르적인 요소는 양념에 불과하다는 감독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양념이 중요한 영화다. 신선한 액션과 팀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는 소재(뺑소니 전담반)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 맛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손님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뺑반>은 사람이란 명목 아래 진부한 가족 서사를 답습한다. 그리고 끝끝내 경찰영화의 서킷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경찰이 아니어도
드라마 <라이브>(2018)에서 한정오(정유미) 순경은 동기 염상수(이광수)에게 사명감이 어떤 거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대답한다.
오늘 같은 일 다신 안 보고 싶은 마음.
내가 기껏 아무것도 잘 모르는 시보지만 범인 잡는데 조금이라도 돕고 싶은 거.
경찰이라는 직업에 초점을 맞췄다는 <뺑반>에는 이런 고민이 담겨있지 않다. 이 영화 속 경찰이 나쁜 놈 잡는 동력은 사명감이 아닌 가족애다.
서민재가 경찰인 이유는 아버지를 죽게 만든 사람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순간의 희열을 위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다른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익숙한 캐릭터와 진부한 서사를 태운 채 안전 운전하는 이 영화의 주행이 안타깝다.
[chaeyooe_cinema]
뺑반 Hit-and-Run Squad
감독 한준희
또다시 조태오('베테랑')를 품은 악당 캐릭터와
'가족의 이름으로' 서사로 무너지는 한국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