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스크>를 보고
<쿠르스크>를 볼 수 없는 이유는 분명했다. 이 영화가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 때문이었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기다리라는 누군가와 기다릴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얼굴과 목소리를, 또다시 보고 들을 용기가 쉬이 나지 않았다.
‘콜린 퍼스, 그가 전하는 위로’라고 쓰인 포스터 문구를 동아줄 삼아 어렵사리 관람했다. 예상과 달리 홍보 문구는 썩은 동아줄이었고, 예상대로 러시아에서 벌어진 이 이야기는 나를 자꾸 진도군 앞바다와 팽목항에 세웠다. 그럼에도 <쿠르스크>에는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이 존재했다. 이 모든 걸 똑똑히 목격한 다음 세대다.
곧 태어날 동생이 있는 소년 미샤(아르테미 스피리도노프)는 유가족이다. 미샤를 두고 떠난 가족은 러시아의 해군 대위였던 아버지 미하일(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이다. 미하일은 유가족을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어뢰 폭발 사고로 침몰한 핵잠수함 쿠르스크호의 23명 생존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국은 구조에 실패했다. 골든타임에 영국과 노르웨이의 원조를 거부했다. 군사 기밀 유출과 국가 체면이 이유였다. 뒤늦게 영국 해군 러셀(콜린 퍼스) 준장의 지휘 아래 잠수사들이 쿠르스크호의 해치를 열었지만 생존자는 없었다. 실화에서도 영화에서도 승조원 118명은 전원 사망했다.
미하일은 존재한다
<쿠르스크>는 분명 미하일의 생사가 중요한 영화지만 감독인 토마스 빈터베르그는 그보다 남겨진 가족의 안위를 더 염려하는 듯하다.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의 주인공은 미샤다. 미하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샤를 보호하고 있는 미하일이 느껴진다.
미하일의 존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영화는 잠수 놀이 중인 미샤의 얼굴로 시작한다. 아이가 숨을 참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함에 놓쳤을 수도 있지만 이때 아이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다. 그 손의 주인이 바로 미하일이다. 미샤의 움직임에 따라 프레임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미하일은 언제든 아이가 신호를 보내면 즉시 물속에서 건져줄 아버지의 팔로서 아이 곁에 존재한다.
엔딩에 다다르면 미하일은 무한해진다. 영화는 미샤가 엄마 타냐(레아 세이두)와 함께 걷는 걸로 끝내는 것처럼 굴지만 카메라에겐 미처 보여주지 못한 것이 있다. 카메라는 모자(母子)가 프레임에서 퇴장하고 난 뒤 이들의 배경으로 존재했던 풍경을 한동안 비춘다.
에릭 로메르의 <여름 이야기>(1996)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너르고 푸른 하늘과 바다에서 나는 미하일을 느꼈다. 무리한 해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자연이 되어서라도 가족 곁에 영원히 미하일이 존재하길 바라는 감독의 바람에서 라스트 신이 비롯한 게 아닐까 하는 낭만적인 상상을 했다.
다음 세대의 이야기
<쿠르스크>가 다음 세대의 행동에 주목한다는 점은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미샤가 이끌도록 한 것에서부터 예견됐다. 쿠르스크호의 침몰 소식이 뭍으로 전해졌을 때부터 미샤는 침묵한다. 울거나 떼쓰지 않는다. 아빠가 괜찮길 바랄 뿐이라는 엄마의 말에 ‘나도’라고 동조한 게 전부다.
대신 똑똑히 보고 듣는다.
정보를 얻고자 본부에 찾아간 엄마에게 회의가 있다며 모른 체하는 대령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들도 본분을 다할 테니 우리 일은 기다리는 거라는 말을 주고받는 가족의 모습을 본다.
부두에서 구조함이 떠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엄마와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대령을 멀리서 지켜본다.
모임 자리에서 뭐라도 얘기해달라는 가족과 더는 말씀드릴 게 없다며 자리를 빠져나가는 관계자를 바라본다.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자식들이고 우리의 남편들이라고 울부짖는 엄마를,
여러분의 아들과 남편은 러시아 해군으로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대답하는 제독을,
진정제를 맞고 기절해 끌려 나가는 가족을,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마구 찍는 기자를,
부끄럽지 않느냐며 소리치는 가족과 이를 막는 군인을,
미샤는 빠짐없이 목격한다.
영화가 끝나기 10분 전 합동 장례식장에서 미샤는 드디어 행동한다. 일렬로 선 어린 유가족들에게 내미는 제독의 손을 미샤는 끝까지 거부한다. 미샤 다음 차례의 아이들 역시 같은 행동을 선택한다. 제독을 포함한 관계자들은 위로할 자격조차 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식장 안을 떠밀리듯 빠져나간다.
미샤가 이런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건 타냐의 공이 크다. 타냐는 애들은 몰라도 된다고 말하는 엄마가 아닌 애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엄마다. 타냐는 결코 사건의 자초지종에서 아들을 소외시키지 않는다. 각종 회견과 모임 자리에 미샤와 함께 간다.
덕분에 미샤는 기다리라는 말이 무능력과 무책임과 뜻하는 말이며, 기다린다는 말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과 죄책감과 같은 말이라는 걸 일찍이 깨친다. 그리고 미샤는 자기 방식대로 제독이 내민 그 손을 영원히 기다리게 한다.
합동 장례식에 참석한 미하일의 동료는 아버지가 쓰던 거라며 미샤의 손목에 해군 시계를 채워준다. 잠수 중인 미샤의 손을 잡아주던 미하일의 손목에 채워졌던 그것이 미샤의 손목으로 넘어간 것이다.
더는 미샤 곁에 미하일은 없다. 그러나 미샤는 미하일처럼 잠수를 할 줄 알고 아버지와 같은 해군 시계를 차고 있다. 이제 미샤는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언제나 아버지가 느껴진다며 미하일을 위로하던 동료의 말처럼 그렇게 성장할 것이다.
우리는 늦었는지도 모른다. 이 나라가 저질렀던 과오의 증거는 소실됐고, 우리는 무시하고 변명하는 법과 진심 없는 용서를 모른 척 받아들이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다를지도 모른다. 노란 리본을 책가방에 달고 다니고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던 그들 중에는 작가 정세랑의 문장을 현실로 만들어 줄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나는 낙관한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유가족을 만들지 않았다. 「피프티 피플」 (2016)
내가 바라는 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염려하는 마음으로 덧붙인다. <쿠르스크>에서 콜린 퍼스의 분량은 특별 출연 수준이며, 홍보 문구-콜린 퍼스, 그가 전하는 위로-는 거짓이다.)
[chaeyooe_cinema]
쿠르스크 Kursk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그 Thomas Vinterberg
그럼에도 기다린다. 우리에겐 다음 세대란 목격자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