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청년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은 적이 있나 싶다. '문재인 정부가 청년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청년은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라고 시인 김춘수가 쓴 '꽃'의 한 구절을 바꿔말해도 퍽 들어맞을 듯하다. 대통령이 청년을 목놓아 부르짖자 움찔한 정부와 각 시도가 일단 양적으로 응답하고 있다.
우선 정부는 지난 3월 15일 청년 일자리 대책을 발표했다. 중소·중견기업에 취직한 청년들의 경제적 지원을 돕는 '청년내일채움공제' 가 대표적이다. 이후 목포시는 2018년도 청년 정책 종합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부산시는 일자리 정책조정회의에서 청년 일자리 대책에 대해 논의하는 등 각 시도가 고구마 줄기처럼 연달아 청년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정부는 60초 중간 광고 이후 시작하는 드라마처럼 밭게 청년 대책을 발표했다. 지난 5일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총 3조 9000억 원 규모의 추가경정 예산안을 편성한 것이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2021년까지 유입되는 에코 세대 39만 명을 방치할 경우 재난 수준의 고용 위기 상황이 예견된다"며 추경 편성 배경을 설명했다.
'청년 대책 드라마'를 지켜보는 시청자는 많고 실업률은 낮아지지 않으니 정부가 자꾸 '새로운 무언가'에 마음이 동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뭔지 잘 모르겠다. 청년 정책 보도를 접할 때마다 영화 <고스트 스토리>(2017)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집 안에 유령이 있는 것을 끝까지 알지 못하는데, 내게 청년 대책이 이 유령처럼 느껴진다. 대책들이 쏟아져도 내 삶은 제자리다. 주변에서 계속 취준생이 늘어나는 걸 보며 체감실업률 기준으로 청년 4명 중 1명은 사실상 실업 상태라는 것만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청년 대책이 실효성 없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청년을 희망으로 보지 않고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고로 빨리 해결해야 하고, 강력하고 단기적인 솔루션에 돈 만한 게 없다. 그래서 정부는 '문제적 청년'을 처리하기 위해 <가을동화> 시대나 먹힐 법한 '얼마면 돼'식 전략을 자꾸 펴는 것이다.
사전은 희망을 '앞으로 잘 될 가능성'으로 풀이한다. 희망의 무게중심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현재 젊은이의 희망을 보고 투자하는 사람과 기업과 나라가 있었다. 개천에서 용도 그렇게 났다. 그러나 희망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앞으로도 잘 될 가능성'이란 뜻으로 변질됐다. 현재 가진 것이 많아야 미래에도 잘 된다는 사고방식은 '대기업과 기득권자'가 희망의 주도권을 잡도록 만들었다.
희망의 자리에 내쫓긴 청년은 자연스레 문제의 자리에 안착했다. 이러한 청년의 상황을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년은 가난하고 연약하고 의존적이며, 게다가 과거의 공적도 없으니 도움받을 자격도 없는 부담일 뿐이다."(「세대 게임 」, 문학과 지성사)라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지난 정부가 청년을 골칫덩이로 여기는 데 나름의 이유는 있다. 대다수 청년들의 교육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산 주체가 되는 시기도 늦어졌고 학자금 대출을 포함한 적지 않은 돈을 사회에 가불했다. 반면에 대기업과 기득권자는 막강한 자본력과 숙련된 노동력을 토대로 이미 완성형 단계에 들어섰으며, 100에 도달했음에도 101을 갈망한다. 빌려만 가고 당최 갚지 않는 청년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과를 내놓는 대기업과 기득권자가 더 예뻐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애초에 희망을 두고 청년과 대기업, 기득권자 간의 경쟁을 붙이는 것은 불공정하다. 이는 준비 운동 중인 선수와 이미 반환점을 돈 선수 간의 대결과 같다. 희망을 제로섬 게임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부당하다. 첫째가 우리 집 기둥이니 동생들은 희생하라는 식의 몰아주기는 구시대적이다. 각자의 강점을 파악해 잘 될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 이 시대의 양육법이다. 이제는 첫째 둘째 셋째 다 잘 살아야 집안 망할 확률도 낮아지고 나중에 부모 원망도 적다.
나는 아직도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신년사에서 '내 삶이 나아지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기억하고 있다. 국민의 뜻과 요구를 나침반으로 삼고 국민께서 삶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게 하겠다는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정부는 청년을 문제 많은 잡초가 아닌 희망의 꽃씨로 대해야 한다. 당장 뽑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게 급선무가 아니라 일정 기간을 가지고 정성 들여 가꿔야 한다. 이제라도 정부가 나의 삶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의 삶에서 희망을 찾아주길 바란다.
청년의 이름만 부르짖는 것만으로는 한국에서 청년은 꽃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