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eyooe Feb 27. 2019

여자들이 움직인다. 한 여자를 두고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보고



총 8개의 장으로 구성된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이하 <더 페이버릿>)는 모두 극 중 대사를 각 장의 제목으로 활용했다. 규칙(대사)에는 어긋나지만 나는 소설가 이승우의 문장을 제목으로 써도 퍽 어울릴 걸로 생각했다.          


배치가 달라졌기 때문에 관계도 변한다.
실존적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사랑의 생애」, 2018)


연출을 맡은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여자들을 끊임없이 이동시킨다. 한 여자만큼은 예외다. 마침내 처음과 정반대의 자리에 당도한 여자들과 끝까지 같은 자리에 있던 한 여자의 관계는 이전과 달라진다. 이 글은 관계를 변화시킨 그 자리들을 둘러보는 데 목적이 있다.       


출처 = IMDb <The Favourite>


한 여자의 감정에는 이유가 있다

예우를 갖추기 위해 한 여자 먼저 소개하겠다. 18세기 초 영국의 여왕 앤(올리비아 콜먼)은 남들보다 몇 곱절은 더 크게 감정을 표현하는 여자다. 그는 자신이 애인에게 한도 없이 선물 공세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 기뻐하고, 전조 없이 애처럼 으앙 울어버려 주변을 당혹게 한다.      


그 기쁨과 슬픔의 소리는 7명의 아이를 잃고 홀로 궁중 생활을 이어 가는 여인의 구조 신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끝없는 복도와 까마득한 천장을 가진 궁정 내에서 한낱 투정이 되어 메아리친다.       


앤은 여자들과 다르게 변하지 않는다. 극 중에서 그는 절대군주 자리를 박탈당하거나 앓고 있던 통풍이 완쾌되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능동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최강 권력자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주변인을 바쁘게 한다.      


출처 = IMDb <The Favourite> IMDb  IMDb


여자들의 비장의 무기, 직설 또는 눈물

공작부인 사라 처칠(레이첼 바이스)은 그런 앤 여왕의 옆자리의 오래된 주인이자 여자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여왕의 뒤에서 치고 빠지는 연설 극을 계획하는 책사이자 직접 나서 당국과 프랑스 전쟁의 지속을 의원들과 논의하는 국왕의 대리인이다.      


앤과 단둘이 있을 때도 그는 몸과 마음을 자신에게 기대는 응석받이 상전을 고분고분히 받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등교를 거부하는 자식의 팔에 억지로 책가방 끈을 끼워 넣는 엄마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그 또한 사랑이 틀림없음을 사라는 앤에게 눈빛으로 똑똑히 전한다.     


마지막 여자는 애비게일 힐(엠마 스톤)이다. 사라의 친척이자 몰락한 귀족인 그는 당장 먹고살기 위해 앤의 궁중 하녀로 취직했지만 최종 목적은 입에 풀칠하는 삶이 아니다. 다시 귀족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현재 사라가 주인으로 있는 여왕의 옆자리를 거쳐야만 한다는 걸 명석한 그는 일찍이 파악한다.


애비게일은 앤에게 현 애인(사라)이 갖지 못한 가여운 눈물을 전략 삼아 접근한다. 그러나 다가오는 남자에게는 냉혹한 포식자처럼 군다. 스파이 노릇을 하라는 야당 당수 할리(니콜라스 홀트)와 결혼으로 신분 복귀를 시켜줄 대령 마샴(존 알윈)이 애비게일보다 강자임이 분명한데도 도리어 잡아먹히는 쪽은 그들처럼 느껴진다.      


출처 = IMDb <The Favourite>


영원한 자리란 절대 없어

1장의 제목 ‘흙에서 악취가 나네요’는 애비게일 자신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애비게일은 오물과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로 궁중에서 사라와 처음으로 마주한다.


그가 지저분해진 까닭은 마차에서 내리려는 그를 함께 탔던 남자가 밀어버려 땅바닥에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격식 있는 옷차림과 장신구의 보호를 받는 사라 앞에서 애비게일은 더욱 처량하다.      


그러나 그 더러움은 완벽히 씻어낼 수 있다. 비록 찬 물과 낡은 하녀복이지만 그것으로 애비게일은 불결한 상태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그가 더러웠다는 사실을 앤은 알지 못한다. 여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애비게일은 깨끗함에 기품을 얹게 되는 수혜를 입는다.      


드레스와 보석이 그녀를 휘감을수록 애비게일이 머무는 자리는 점차 좋아진다. 그는 모로 누우면 잠자는 다른 하녀의 얼굴이 부딪칠 것 같은 공용 침실에서 개인 침대가 있는 1인실을 거쳐 마침내 귀족 대령 남편과 함께 살 궁궐 내 신혼 방에 도달한다.       


출처 = IMDb <The Favourite>


사라의 사정은 밝지 않다. 침실 하녀로 격상된 애비게일의 속임수로 사라는 애비게일이 속했었던 가장 낮은 곳, 땅바닥으로 가게 된다. 애비게일이 건넨 독버섯이 든 차를 마신 채 말을 탄 사라는 머지않아 정신을 잃고 낙마하지만 말과 줄로 연결되어있던 탓에 거친 숲속 바닥을 질질 끌려다닌다.      


이 사건으로 그의 얼굴 왼쪽에는 길고 커다란 상처가 생긴다. 그러나 그것은 애비게일이 땅바닥에서 묻어왔던 더러움처럼 씻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사라는 앤 앞에 다시 섰지만 흉터가 생긴 얼굴 때문에 앤으로부터 거부당한다. 고풍스러운 레이스 스카프로 그것을 가려봐도 앤은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        


속결로 부여받은 개인 공간의 열쇠까지 애비게일에게 넘겨준 사라는 남편과 함께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이 그의 종착지가 아니다. 애비게일은 국가 회계 장부를 모략해 사라 내외에게 공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씌운다. 결국 사라는 앤의 자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국외로 추방된다.        


출처 = IMDb <The Favourite>


이승우의 문장에 이어 앙드레 지드의 문장도 <더 페이버릿>과 퍽 조화롭다. 무엇보다 낙관의 등 뒤에 서 있는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탐낼 만한 문장이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행위는 어디까지나 비통한 것이다.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만이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
(「배덕자」, 민음사, 2015)      


이동은 끝났다. 이제 높고 넓은 궁궐 안에는 땅바닥에서부터 여왕의 침실까지 올라온 한 여자와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여자만이 존재한다. 하녀를 질투하고 여왕에게 오소리를 닮았다고 직언하던 한 여자는 더는 없다. 그래서 비싸고 예쁜 것으로만 둘러싸인 그곳에서 여자들은 행복한가. 여왕의 일곱 마리 토끼 중 적어도 한 마리는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출처 = oscar.go.com


(어제 열렸던 2019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올리비아 콜먼이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기쁨에 어쩔 줄 모르고 공중에 감사의 인사를 마구 날리던 콜먼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다. 제멋대로 철부지인 앤 여왕이 밉지 않았던 건 역시 그 때문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다.)




[chaeyooe_cinema]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THE FAVOURITE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Giorgos Lanthimos



땅바닥에서부터 침대로까지.
씻을 수 있는 상처부터 씻기지 않는 상처까지.
[★★★★]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 「메리 포핀스」를 쓰지 않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