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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Mar 05. 2019

노벨 문학상, 아카데미. 그거 다 누구 덕분입니까?

<더 와이프>를 보고



세 번 식겁했다. 남성 교수가 글을 써야만 작가라고 강조하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전부 여학생인 걸 알고 한 번. 노벨상 시상식 연단에 자리한 수상자 중 여성은 한두 명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두 번. 그리고 객석에서 수상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들의 뒷모습 대부분이 여성이란 걸 감지했을 때 세 번.     

 

그 강의실과 그 객석에 복잡한 표정의 조안이 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최은영 작가의 문장 중 가장 섬뜩하게 여기는 한 문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는 여자애야.
(「601, 602」, 2018)      


출처 = IMDb <THE WIFE>


와이프에겐 무슨 일이 있었나

언제였을까. 조안이 더 라이터(THE WRITER)가 아닌 더 와이프(THE WIFE)의 삶을 선택한 시점 말이다. 궁금해하는 관객의 손을 잡고 영화는 그가 대학생이었던 시절로 돌아간다. 소설가란 직업에 대한 열망과 재능으로 가득 찬 조안(애니 스털크-글렌 클로즈의 실제 딸이기도 하다-)에게 이미 작가가 된 한 여성이 주는 조언은 글 잘 쓰는 팁 같은 게 아니다.      


“쓰지 말아요.”     


헛소리가 아니다. 작가는 ‘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이곳’ 신세를 면치 못할 거라 새싹에게 단언한다. 조안은 작가를 따라 남성뿐인 출판사 운영자와 서평가로 구성된 그들과 한 번도 읽히지 못한 책들이 꽂혀있는 이곳, 책장을 본다. 문단의 권력이 남성의 손에 있는 한 여성 작가의 작품은 무용할 거란 현실도 함께 드러난다. 조안은 제대로 꿈꿔보기도 전에 꿈에서 깬다.      


출처 = IMDb <THE WIFE>


조안 아처는 작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만 그렇다고 재능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자신의 문학 지도 교수였던 사랑하는 남자 조셉 캐슬먼(해리 로이드)의 아내가 된 조안은 그의 죽어가는 첫 소설에 숨을 불어넣기 위해 타자기 앞에 다시 앉는다.      


약 30년간 이어진 조안 캐슬먼(글렌 클로즈)이 쓴 조셉 캐슬먼(조나단 프라이스)의 작품은 마침내 부부가 같이 전화기 넘어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되는 기적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수상의 영광은 오로지 남성이자 남편, 조셉만의 것이다.     


출처 = IMDb <THE WIFE>


더는 그런 표정 짓지 않아

시상식이 열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조안의 30년 무고장 감정 보온 장치는 먹통이 된다. 조안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젊은 여성인 전담 포토그래퍼에게 제임스 조이스의 시를 읊고, 호두 겉면에 애정의 한 구절 적어 넣는 (자신에게도 했던) 유혹의 레퍼토리를 펼치고, 자신이 챙기지 않으면 약 먹을 시간도 안경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남편을 이전과 달리 참아줄 수가 없다.


기폭제는 이것이다. 조안은 자신에게서 노벨 문학상을 뺏어간 거로도 모자라 진짜 자기 것이라 여기는 조셉을 견디지 못한다. 대중 앞에서 자신을 위대한 작가의 안쓰러운 아녀자로 만들어 버리는 조셉의 스피치가 계속될수록 늘 온화하고 절제된 조안의 표정에도 변화가 생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더 와이프>

이때를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시시각각 바람이 불고 물결이 치는 조안의 감정을 투명하게 비추는 글렌 클로즈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꼬박꼬박 챙긴다. 그리고 끝내 수상 소감을 밝히는 애프터 파티에서 내 이름은 빼달라는 조안의 간곡한 청을 가뿐히 무시하고, 나의 영혼이라며 아내를 치켜세우는 남편을 보며 조안은 결심한다.      


지치지 않는 여성 편력에
주둥이에 묻은 케첩처럼 성가시고
무엇보다 내 상을 가로챈 이 늙은이에게서 내 떠나리.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참석자들의 박수가 전부 그를 위한 것임에도 조안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 보이는 이유다.      


출처 = 씨네21 <더 와이프>


그럼에도 그 표정에는

그러나 정작 조안을 떠나는 건 조셉이다. 이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이없이 조셉은 세상을 떠버린다. 숙소로 돌아와 이혼을 요구하는 조안과 싸우던 조셉에게 심장마비가 발생한 것이다.


놀란 조안은 짐을 싸다 말고 달려와 심장을 움켜쥔 남편의 호흡을 돕는다. 그렇게 조셉은 끝까지 조안에게 평생 고생한 아내 역할에서 벗어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제 조안의 역할은 갑작스레 사망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남겨진 가족이다. 그는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잠시 벗어 두었던 좋은 아내 가면을 다시 쓴다. 그리고 조셉의 전기를 쓰고 싶다며 일정 내내 조안에게 남편의 공적에 대한 의심을 제기했던 작가 나다니엘(크리스찬 슬레이터)을 불러 경고한다.     


“남편의 재능을 훼손하지 마세요.”     


그러나 다행히도 조안의 표정은 이전과 미묘하게 다르다. 조안에게 더는 남편이 벗어놓은 코트도 때맞춰 먹여야 할 약도 없다. 오직 빈 노트만이 여성의 앞에 있다.




[chaeyooe_cinema]

더 와이프 THE WIFE

감독 비에른 룽에 Bjorn Runge



평작을 아카데미에 올린 것 역시 여성, 글렌 클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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