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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Mar 28. 2019

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여도 용서할 수 없다

<라스트 미션>을 보고



‘얼 스톤’은 보기 드물게 견딜만한 노인이었다. 훈계 대신 유머를 구사하고, 잘못과 늙음을 혼동하지 않았다. 87살의 이 미국 남성 백인 캐릭터는 올해 한국 나이로 90살(1930년 출생)이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면서 더 또렷또렷해졌다.


이스트우드는 남다은 평론가의 묘사처럼, ‘끝까지 이글거리며 초라하게 고개를 떨구지 않는 자존감의 초상’이자 ‘마음을 모두 기대고 싶은 온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시대 마지막 강한 남자’, 「감정과 욕망의 시간」, 2005)     


그러나 이스트우드의 ‘얼’ 조차 보기 쉬운 지긋지긋한 가장이었다. 지금껏 맏딸 역할밖에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백발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참회하는 그를 간단히 용서하는 가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글은 고해성사를 막 마친 신도처럼 편안해 보이는 가장의 그 표정이 사무쳐 시작했다.


출처 = IMDb <The Mule>


아빠를 기다리는 딸과 남편을 기대하지 않는 아내

얼의 다 큰 딸 아이리스(앨리슨 이스트우드)는 아직 아버지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결혼식 당일 아이리스는 아버지가 미심쩍지만 올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얼의 아내이자 아이리스의 엄마인 메리(다이앤 웨스트)는 생각이 다르다. 동요 없이 손녀 지니의 드레스 매무새를 살피던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딸에게 한마디 한다.

“기대하지 마라.”      


이때 메리는 무수한 생일과 결혼기념일마다 홀로 촛불을 끄다 지쳐버린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다. 네 아버지는 항상 일이 먼저였다는 엄마의 다독임에 아이리스는 평정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지니가 쏘아 올린 순수한 물음에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그럼 엄마는 결혼식에서 누구랑 같이 걸어?”    

    

출처 = 씨네21 <라스트 미션>


이번에도 얼은 일이 바빠 가족의 대사에 참석하지 못한 걸까. 그러나 현실은 예상보다 더 최악이다. 얼은 바에서 웨딩 파티 일행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딸의 결혼식을 떠올린다. 얼은 까먹을 수 없는 걸 까먹었다. 그가 일이 최우선인 사람이 아니라 그저 가족에 무신경한 사람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가족에게 부재로서 존재감을 증명했던 얼은 12년 뒤 비로소 가족 앞에 실재한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있을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발로 뛰어 성공한 화훼 사업가 얼은 2000년대 중후반 전자상거래의 비약과 함께 추락한다. 2017년 압류당한 화훼 농장 ‘Sunnyside Meadows’의 주인이 된 얼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으로 향한다.     


출처 = IMDb <The Mule>


두 사람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돌아온 얼을 반기는 건 그에게 상처받은 적 없는 지니(타이사 파미가)뿐이다. 아직 지니에게 얼은 자신이 9살 때부터 엽서를 보내온 다정한 할아버지다. 그러나 메리와 아이리스는 지니의 약혼 파티에 나타난 얼을 보자마자 동시에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얼은 다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그런 거였다며 밥벌이의 서러움을 주장하지만 메리에겐 어림없는 소리다. 초반에 삽입된 화훼 경연 대회 에피소드는 그동안 얼이 화훼 산업계의 스타로서의 삶을 온전히 즐겼음을 추측하게 한다.      


타인의 박수와 환호를 중요시하는 얼에게 경멸의 시선은 고역이다. 메리의 입을 통해 자신이 손녀의 결혼식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약속 역시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파티 참석자들 귀에 꽂히자 얼은 서둘러 자리를 뜬다.  

    

출처 = 씨네21 <라스트 미션>


꿈쩍 않는 딸, 흔들리는 아내

‘얼 스톤 리턴즈’는 지니의 결혼식에서 시작된다. 가족을 만난 얼은 이전보다 당당하다. 손녀의 결혼식에 꽃장식을 해주고 술값도 자신이 다 냈기 때문이다. 망한 사장님인 얼에게 할아버지 노릇을 할 큰돈이 생긴 건 멕시코 카르텔의 마약 운반책으로 활동하면서부터다. 얼은 이제 딸은 어렵더라도 아내의 마음만큼은 열 수 있을 거라 예단하지만 헛꿈이다.      


메리는 스리슬쩍 추억을 공유하고자 하는 남편에게 우리는 낭만적인 황혼의 부부가 아님을 주의시킨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청하는 남편에게 메리는 흔들리지만 이내 못하겠다며 고개를 젓는다. 그럼에도 얼은 나아지는 형편을 뒷배 삼아 환대 없는 가족 행사에 참석한다.     


영화 중반부부터 두 여자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다. 지니의 졸업식에서 자리를 찾는 얼을 보자마자 질색하며 일어나 그에게서 가장 먼 자리로 옮기는 아이리스와 달리 메리는 간간이 그에게 미소 짓는다. 얼에 대한 메리의 혐오 강도가 꽤 약해졌음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출처 = IMDb <The Mule>


용서받을 수 있는 자

곧 영화는 후반부에 얼이 가족에게 용서받을 기회를 마련해준다. 메리를 침상의 병든 아내로 만든 것이다. 이때부터 얼은 무려 멕시코 카르텔의 명령을 무시하고 아내를 돌보러 온 남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는 호흡기를 차고 숨을 헐떡이는 아내에게 음식을 떠먹이고 사랑의 말을 건넨다. 조직으로부터 온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메시지는 가볍게 넘기고, 늦은 밤 아내의 잠자리를 곁에서 지킨다.      


출처 = 씨네21 <라스트 미션>


그 결과 얼은 딸에게는 ‘아버지가 다 망쳐버린 게 아니’라는 말을, 아내에게는 ‘당신은 내게 최고의 고통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당신이 여기 있어 행복하다’는 말을 듣는다. 이뿐 만이 아니다. 메리의 장례식이 끝난 뒤 얼은 아이리스로부터 추수감사절에 집에 오시라는 얘기도 듣는다. 내내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던 그가 마침내 가족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은 것이다. 단 며칠간의 간호로 말이다.       


이후 마약 운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얼은 스스로 유죄임을 밝혀 죗값을 달게 받겠다는 의사를 표명한다. 나쁜 남편이자 형편없는 아버지로서 지은 죄를 사함 받는 ‘라스트 미션’을 완수한 그에게 사법적 절차는 의미 없다. 깨끗이 혐의를 인정하는 노인의 태도에 재판장 안은 묘한 숭고함이 흐르고, 그는 딸과 손녀의 슬픔을 받으며 뒤돌아선다.   


출처 = IMDb <The Mule>


영화에게 얼은 진짜 죄인이 아니다

어떻게 메리와 아이리스는 얼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답은 나와 있다. 얼은 남편이고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깥일’이라는 모호한 말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바깥일을 하다 보면 집안의 대소사를 잊을 수도 있고,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영화는 얼을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얼이 흑인과 아시아인을 돕고, 총구를 눈앞에 들이대도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에피소드들을 삽입해 그가 본디 괜찮은 인간임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므로 남은 가족 구성원들은 얼을 이해해야 한다. 받아주어야 한다. 그저 그는 바쁘고 힘들었을 뿐이다.      


출처 = 씨네21 <라스트 미션>


<라스트 미션>은 이동진 평론가의 평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이 영화’인 영화다. 탄피를 씹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제임스 울컷) 강렬한 그의 얼굴을 지운 채, 가족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그래서 힘겨웠다. 아흔 살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 못 하고 딴지를 거는 것 같아 께름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얼은 그렇게 쉽게 가족에게 용서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제껏 아내와 자식이 얼에게 고통받은 것에 비해 그가 들인 시간과 정성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메리와 아이리스와 이스트우드와 영화와는 다른 선택을 하려 한다.      


나는 얼을 용서하지 않겠다.     






[chaeyooe_cinema]

라스트 미션 THE MULE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Clint Eastwood



스스로를 용서하지도, 존경을 요구하지도 않는 노인이 여기 살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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