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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Apr 12. 2019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를 보고



‘문득 시가 떠오르면 넌 시를 읊고, 난 받아 적는 거야’라는 줄거리의 핵심 문장을 읽었을 때만 해도 나는 그런 영화를 예상했다. 사제가 마주 보고 앉아 도란도란 언어의 아름다움을 깨달아 가는 이야기 말이다. 선생님은 그런 인물일 거라 추측했다. 마음에 불이라고는 없는 자분자분한 성격의 소유자 말이다. 그러나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멋대로 지레짐작하는 나의 이마에 강력한 딱밤을 날리는 영화다. 시 읊는 아이와 선생님이 나오는데 맙소사, 이 영화 스릴러다.      


출처 = 씨네21 <나의 작은 시인에게>


그는 아무도 모르게 끓고 있다

리사 스피넬리(매기 질렌할)는 언뜻 보면 삶의 안정기에 접어든 여자다. 그는 20년 차 베테랑 유치원 교사이고, 세 자녀는 신경은 쓰이지만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할 나이이며, 남편과는 여전히 진한 스킨십이 가능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굴러가는 삶 속에서 리사가 관심을 쏟는 건 ‘시작(詩作)’이다. 평생교육원에서 시 쓰기 강좌를 듣기 시작한 그는 모범생처럼 과제를 해 가지만 결코 우등생이 되지 못한다.      


그랬던 리사가 단번에 클래스의 다크호스로 부상하는 건 전적으로 다섯 살짜리 제자 지미 로이(파커 세박) 덕분이다. 교실에서 혼자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시를 읊는 지미에게서 리사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감지한다. 평범한 영화라면 천재 소년에게 자극을 받은 뛰어난 교사가 훌륭한 시인도 되어 가는 길을 걷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 영화는 도발적인 길을 택한다.      


리사는 지미의 시를 훔친다. 그는 수업시간에 지미의 시를 자기가 쓴 것처럼 발표한다. 사라 코랑겔로 감독은 예술가의 윤리를 저버린 그가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강사인 사이먼(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상찬에 은은히 미소 짓고, 어떻게 소년의 관점에서 쓰게 됐냐는 학우의 질문에 그저 영감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시인처럼 대답하는 리사의 표정을 당당히 카메라에 담는다. 그제야 나는 감독의 관심이 시가 아닌 욕망하는 한 여자에게 있음을 알아차렸다.     


출처 = 씨네21 <나의 작은 시인에게>


당신은 나를 혼란스럽게 해

이후 지미를 대하는 리사의 행동은 그가 열성적 후원자인지 아니면 아동 착취자인지 갈등하게 만든다. 리사는 낮잠 자는 지미를 깨워 화장실에서 함께 고양이처럼 바닥에 웅크려보기도 하고, 아이를 높은 곳에 올려 시선의 차이를 체감하도록 돕는다. 이런 교사의 일대일 관점 전환 수업은 제자의 능력 향상을 위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혹시 리사가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투자 중인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이제 리사는 교실 밖에서 시가 터질 가능성을 염려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그는 시가 생각나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자신의 번호를 아이의 휴대 전화에 저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지미에게서 신호가 오면 리사는 구원의 말씀을 기다리던 신도처럼 그 즉시 바닥에 엎드리거나 책상에 허리를 숙인 채 펜을 들고 쏟아지는 시어를 미친 듯이 종이에 주워 담는 것이다. 남편과 섹스 도중이어도 말이다.      


필기를 끝마칠 때마다 리사는 흥분과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런 리사를 보며 나는 무엇이 그를 그토록 춤추게 하는지 자문했다. 날로 성장하는 제자? 시의 경이로움 그 자체? 아니면 투자 대비 뛰어난 결과물? 혹시 그것을 클래스에서 낭송하고 난 뒤 자신이 받을 인정?                


출처 = 씨네21 <나의 작은 시인에게>


그의 과거가 궁금하다

리사가 지미의 재능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미 그가 선을 한참 넘고 나서야 어렴풋이 드러난다. 리사는 자신의 잘못으로 새로운 유치원 다니게 된 지미를 찾아가 그길로 아이와 함께 호수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 시간이 ‘여행’이라고 생각한 건 리사뿐이었다는 사실은 머지않아 확인된다. 그는 숙소 욕실 너머로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신고 전화를 걸려는 지미의 목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한다.      


잠긴 욕실 문고리를 돌리며 리사는 지미를 향해 울부짖는다. 내가 지금 너를 돌보지 않으면 너도 나처럼 ‘그림자가 될 거야’라고. ‘그림자’라는 단어 듣자마자 리사의 어린 시절을 상상했다. 머릿속에는 일로 바쁜 부모와 제자의 재능을 그냥 지나친 스승들의 손에 길러진 작은 소녀 시인이 홀로 서 있었다.      


출처 = 씨네21 <나의 작은 시인에게>


리사를 지켜보면서 나는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의 여성 주인공들을 떠올렸다. 그들 역시 리사처럼 직장을 다니는 아내이자 엄마이며, 내면이 천천히 썩어 들어가는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슬리마니가 쓴 「달콤한 노래」(2017)에는 그들 모두의 심리 상태를 정의해줄 만한 문장이 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 행복, 단순하고 고요한 이 감옥 같은 행복.     


아마도 지미를 더는 만날 수 없을 리사는 다시 ‘이 행복’ 속으로 침잠할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시작(詩作)할 수 있을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미 대신 내가 그를 위한 시를 노래해본다. ‘시의 여백은 아름다움이라지만 나의 여백은 그저 빈 곳이로구나.     





[chaeyooe_cinema]

나의 작은 시인에게 The Kindergarten Teacher

감독 사라 코랑겔로 Sara Colangelo



시의 여백은 아름다움이라지만 나의 여백은 그저 빈 곳이로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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