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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May 20. 2019

최선을 다해 '잘 모르겠습니다'

<배심원들>을 보고


지인이 상담을 요청했다. 퇴사를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는 2개월 된 신입 사원이었다. 평소 같으면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말하고 발을 뺐을 거다. 나는 세상 사람 모두가 ‘답정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외였다. 정말 아끼는 동생이었기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을 주고 싶었다.      


머리를 싸맸다. 시간이 약이라고 조금만 더 버티면 해 뜬다고 말하기에 동생은 이미 업무 스트레스로 5kg이나 빠진 상태였다. 생명은 소중한 거니까 일단 그만두고 뒷일을 도모해보자고 말하기에 동생의 업계는 ‘두 달 다니고 때려치운 X’로 소문나기에 딱 좋을 만큼 좁았다.


며칠을 곯았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 이야기라며 주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고, 유사한 사례를 찾기 위해 사이버 커뮤니티를 두루 순례한 뒤 나는 동생과 마주 앉았다. 몇 초간의 침묵. 흡사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서 있는 교황을 바라보는 신도의 눈빛을 한 그 앞에서 나는 죄인처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           


출처 = 네이버 영화 <배심원들>


8번 배심원에게 당연한 건 없다

영화 <배심원들>에는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조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2008년 대한민국 첫 국민참여재판의 8번 배심원 권남우(박형식)다. 공판 뒤 배심원들끼리 가진 피고인의 유무죄 여부를 가리는 종이 투표에서 그는 유일하게 의견 보류 상태다. 고민 중인 그를 다른 배심원들은 의아하게 바라본다. 살해 동기가 충분하다. 증거도 있다. 목격자와 법의학자가 진술도 했다. 무엇보다 피고인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 무용하게도 ‘제 어미를 잔혹하게 죽인 아들’이라는 프레임에 이미 갇힌 상태다. 이 사건은 유죄다.      


그러나 권남우는 의심한다. 생각한다. 8시간째 이어지고 있는 평의. 펜을 손에 쥔 채 골똘히 상념에 빠져있던 권남우는 대세도 그 반대도 아닌 제삼 지대의 의견을 낸다. “잘 모르겠어요…….” 8번 배심원의 한마디에 모두는 아연실색한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재판부에 사건기록을 몽땅 요청해 첫 장부터 읽기 시작한다.   

   

잘 모르겠다는 말은 회피의 언어로 자주 쓰이지만 나와 권남우의 경우는 다르다. 우리는 정면 돌파를 택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답한 것이다.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대충 넘어가면 그만인 일을 굳이 깊이 생각해서 미로에 빠져버린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모르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배심원들>


우리가 그릴 그림은 보기 좋은 그림

<배심원들>은 확실에서 불확실로, 앎에서 모름으로 생각이 넓어지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영화에서 가장 확신에 차 있던 인물은 18년 차 형사 재판 담당 부장판사이자 이번 국민참여재판의 재판장 김준겸(문소리)이다. 그는 ‘최초’에 목숨 걸고 법원 앞에 진을 친 취재진에게 ‘좋은 그림’을 보여줄 자신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있다. 윗선에서는 사법부의 명예가 걸린 무조건 잘해야 하는 재판이라고 어깨를 두드리고, 이 재판에는 자신의 고등 법원으로의 승진 여부도 걸려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가 포함된 법원조직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그 때문에 존속살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 조진식(윤경호) 사건은 이미 유죄로 스케치와 색 작업이 끝난 상태다. 이제 남은 건 공판장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합을 짠 변론을 물 흐르듯 읊고, 비법률가인 8명의 배심원이 비전문적인 평결을 내면 그걸 적당히 참고해 피고인에게 적정한 형을 부과하는 절차다.  

    

그리고 법원장(권해효)이 취재진을 향해 “사법권은 나라의 주인 즉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제도(실제 첫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던 대구지방법원의 재판장 황영목의 소회를 옮겼다)”라고 마무리 멘트까지 날리면 완성이다. 그러면 이 소동은 사법부 역사의 한 페이지에 결점 없이 기록될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배심원들>


그가 완성한 그림은 실패한 그림

그러나 계획은 변경된다. 권남우에 의해 유죄에서 ‘잘 모르겠다’로 종국에는 무죄로까지 생각이 바뀐 ‘위대한 아마추어들(박은정,「왜 법의 지배인가」)’에 의해 김준겸의 판단도 선고의 순간 달라진다. 참고사항일 뿐인 그들의 평결-피고인이 평소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살해 동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증거로 제출된 피 묻지 않은 망치가 수상쩍다. 증인들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이 마음에 걸린다.      


무엇보다 권남우의 마지막 외침이 결정적이다. 권남우는 ‘법은 처벌이 아닌 함부로 처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기준’이라는 법의 존재 목적을 김준겸의 등에 꽂고 재고(再考)를 요청한다. 김준겸은 그 말을 흘려들을 수 없다. 배심원 선정 절차 과정에서 자신이 권남우에게 진리라는 듯이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개인사보다 사법부의 역사를 우위에 두고 해석 작업에 임했음을 뒤늦게 인정한다.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데 실패하고 ‘잘 모르겠는’ 상황에 이른 그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고대 로마의 법 원칙으로 돌아간다. 법관으로서의 신념을 담은 자신의 좌우명을 곱씹은 김준겸은 피고인 조진식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예상치 못한 붓 터치에 그림 역시 달라졌지만 이 결과물을 발표할 법조계 큐레이터는 문과 최고 아웃풋이자 말로 먹고사는 고단수다. 자석에 달라붙은 무수한 클립처럼 자신에게 달려든 기자들 앞에서 재판장은 ‘배심원과 재판부의 의견이 일치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첫 국민참여재판의 가치를 드높인다. 그것 역시 고고한 사법부 박물관에 걸기에 나쁘지 않은 그림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배심원들>


사실은 우리가 서로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아가서, 우리가 바랐던 것은 바로 그것,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바다」, 존 밴빌.            


재판장도 배심원도 그랬다. 사람이 아닌 사건만 봤다. 피고인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첫 국민참여재판만 무사히 끝나면 된다고 모두 생각했다. 유죄라는 간편한 확신은 거기서 나왔다. 그러나 다행이다. 사건이 아닌 사람을 알고 싶었던 누군가가 적어도 한 명은 있었으니까 말이다. 알면 알수록 잘 모르겠다는 말은 그래서 최선이다.   




[chaeyooe_cinema]     

배심원들 Juror 8

감독 홍승완



36.5도의 선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헌법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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