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를 보고
<엑시트>는 나에게 <마션>(2015) 이후 가장 큰 교훈을 준 영화였다. <마션>의 식물학자 겸 기계공학자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가 화성에 홀로 낙오되고도 살아남는 과정을 지켜보며 문과 출신인 나는 자조했다. 역시 사람은 이과를 나와야 해.
<엑시트>의 교훈은 다행히 희망적이었다. 재난을 막강한 체력으로 돌파하는 대학 산악 동아리 선후배 용남(조정석)과 의주(임윤아)를 보며 생활체육인인 나는 흐뭇했다. 역시 사람은 운동을 해야 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좌석에 가만히 앉아 스마트폰으로 검색했다. 실내 클라이밍. 몸이 근질거렸다.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주인공과는 다르다
맨몸의 두 주인공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엑시트>는 요즘의 액션 영화와 구별된다. 그들은 유독 가스를 피해 달리고 올라야 하는 상황에 맞게 단출하다. 거듭 양손으로 무엇이라도 잡아야만 하는 이들에게 현대인과 한 몸이 된 스마트폰조차 거추장스럽다. 이토록 가벼운 차림의 두 사람은 각종 신형 무기들로 무장한 슈퍼 히어로들이 액션 영화의 주인공인 시대에서 희귀한 매력을 발산한다.
오직 한 사람이 만들어 내는 스릴
맨몸이 주는 긴장감과 활력은 테러 직후 용남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미션 수행 시퀀스에서 충분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어머니 칠순 잔치에 걸맞게 양복에 넥타이까지 맸던 용남은 잠긴 옥상 문을 열어야 하는 긴급 상황에 적합하도록 입은 옷을 덜어낸다.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이 된 용남은 허리에 로프를 묶고 일단 구름정원 컨벤션홀 옆 건물로 점프한 뒤 다시 컨벤션홀 외벽에 붙어 옥상을 향해 차츰차츰 전진한다. 이때 채경선 미술감독의 의도대로 ‘아슬아슬 손이 닿지 않을 것처럼 디자인’된 외관 돌출부들은 그것들을 잡으려는 용남의 악력을 더 실감케 한다.
하이라이트는 고지를 앞두고 벌어지는 용남과 사자 머리상의 일대일이다. 영양가 없는 동아리와 창피한 철봉 운동을 거쳐 성사된 이 운명적 대결은 잘 짜인 액션 세트 피스에서 느껴지는 흥분보다 더 원초적이다.
의주가 장갑을 벗었을 때
짧지만 의주의 맨손을 클로즈업한 숏은 인상적이다. 용남이 지하철역으로 방독면을 구하러 간 사이 고층을 오를 준비를 하는 의주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테이프로 둘둘 감은 고무장갑을 벗는 일이다. 그래야 손이 미끄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가진 것을 버려야 하는 그의 상황은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더 많은 스펙을 갖춰야 하는 현실과 정반대다. 그런 점에서 의주의 땀난 맨손은 강인한 동시에 가엽다.
당장 뛰고 싶은, 같이 달리고 싶은
<미션 임파서블: 폴 아웃>(2018)에서의 톰 크루즈의 장거리 달리기를 떠오르게 하는 후반 동반 질주 장면은 다시 찾아온 맨몸의 활력이다. 이 장면에서 용남과 의주는 최종 목적지인 타워 크레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린다.
최근의 스크린에서 이렇게 홀가분히 앞뒤 재지 않고 달리는 성인 남녀의 이미지를 본 기억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기뻤다. 그때 상영관 안으로 불어 든 건강한 바람을 분명 나는 느꼈다. 그것은 전력 질주하는 사람만이 일으킬 수 있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를 구합니다
장가 못 간 취업 준비생 용남과 이름만 웨딩홀 부지점장인 불안정한 직장인 의주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맨몸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구조 헬기의 우선 탑승권을 줄 만한 권력자나 007 시리즈의 Q와 같은 조직의 천재 조력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 기댈 말한 연줄이 없는 두 청년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외줄을 탄다.
앙드레 지드가 쓴 「배덕자」(1902)의 주인공 미셀은 중증 결핵으로 무력감에 빠져있던 때에 소년 바쉬르를 만나 살고 싶다는 의지를 되찾는다. 그는 바쉬르를 보며 생각한다.
아아! 그는 얼마나 건강한가!
내가 그에게 반한 것은 이것이다.
건강이다.
이 작은 육체의 건강은 아름다웠다.
미셀이 바쉬르의 건강에 반했다면, 나는 <엑시트>의 그것에 반했다. 이 영화의 건강은 용남과 의주의 육체에서 나온다. 그들이 가진 아름다움이 다행히 나에게도 있다. 나는 이것을 지킬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주말 실내 클라이밍장에 간다.
[chaeyooe_cinema]
엑시트 EXIT
감독 이상근
스크린에서 오랜만에 느끼는 맨몸의 가벼움, 맨몸의 활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