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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Dec 17. 2018

당신의 위로엔 노력이 들어 있습니까

<살아남은 아이>를 보고


살아남는 중입니다

불행한 부부가 있다. 편혜영은 「저녁의 구애」에서 불행이란 모두 무사한데 자신에게만 불운이 닥치는 것이라 했다. 부부는 불운하게도 자식을 잃었다. 남의 모든 자식이 어제처럼 오늘도 학교에 가고 그날, 아들 은찬과 물놀이를 갔던 아이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왔지만 은찬만은 그러지 못했다.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다가 그리된 것이라고 부모는 들었다. 때문에 이 사건에는 필연적으로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은찬과 (은찬에 의해) 살아남은 아이. 불행한 부부는 이 행운의 아이를 자신들의 삶에 포함하려 한다.


사는 것과 살아남는 것은 다르다. 사는 것은 단순하다. 이미 내가 만들어놓은 일상의 궤적대로 따라 움직이면 하루가 간다.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행위. 우리의 몸은 특별한 의지 없이도 이 루틴을 마무리할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살아남는 것은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발밑을 살피거나 뒤통수로 날아오는 돌이 없는지 둘러보는 정도를 넘어선다. 누군가 발밑에서 끊임없이 그들의 발목을 잡아당겨 그들을 주저앉히거나 때로는 눈을 가려 앞이 보이지 않게 한다. 집 근처 길을 통째로 사라지게 해 발걸음을 뗄 수조차 없게 만든다. 


이러한 재난 같은 상황에 그들 중 일부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포기하거나 또 일부는 자신의 삶을 놓아버린다. 그렇다고 그러한 결말을 맺은 이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전쟁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우울에서 살아남으려는 이들이 겪는 고통의 크기는 겪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다. 


출처 :  이미지 = 씨네21 <살아남은 아이>

  

보호자와 구원자

그중 자식이 잃은 부모의 살아남기는 가늠조차 죄스럽다. 남겨진 부모는 자식이 잠들던 침대와 입었던 옷이 가득 찬 옷장이 있는 방을 드나들어야 한다. 자식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 담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한다. 자식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다니는 길가를 걸어야 한다. 


부부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방법으로 기현을 품는 것을 택한다. 기현은 은찬이 세상에 남기고 간 것 중 하필이면 그 귀하다는 생명 자체이며, 은찬의 죽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할 단일한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죽은 은찬의 삶은 부부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산 기현의 삶은 부부가 돌볼 수 있다. 부부는 기현을 챙기며 은찬에 대한 결핍을 채우고 죄책감을 덜고자 한다.  


기현 역시 살아남기 위해 부부가 열어준 가정의 문으로 들어간다. 혼자인 기현에겐 자신을 보호하고 이끌어 줄 어른이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게 와준 어른이 제게 실망해 떠나가지 않도록 애쓴다. 도배 기술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현장에서 성실히 일하는 시간을 점차 늘린다. 


그러나 그들의 보호막에서 기현은 결국 도망쳐나온다. 함께 한 시간만큼 쌓이는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은 기현이 애써 누르고 있던 죄책감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그 감정은 기현의 살아남으려는 의지를 좀 먹고 종국에는 은찬이 죽었던 그 강물에 제 발로 들어가게 만든다. 


출처 :  이미지 = 씨네21 <살아남은 아이>


위로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 의 등장인물 아멜리아는 아들 이언의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이 위로한답시고 건네는 ‘삶은 계속된다.’ 라는 말을 들고 환멸을 느낀다. 이어서 그녀는 반박한다. 


'삶은 계속되지 않아요. 계속되는 건 죽음이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은 그들을 위로할 수도 살릴 수도 없다. 그 말은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말과 같은데, 산 자에게서 죽은 자를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은 산 사람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 사람은 이제 죽은 사람과 함께,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과 함께 살아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정확하지 않은 위로는 선한 의지와는 별개로 그 사람도 죽으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베풀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초콜릿 케이크를 건네거나 대책 없는 기도를 드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그런 행위는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곁에 있는 자신들을 위로하는 일이다. 어설픈 타인의 도움은 화살이 되어 그들의 등에 꽂히거나 총알이 되어 그들의 관자놀이에 박힌다. 


<살아남은 아이>는 이러한 금지 사항을 숙지한 결과물이다. 카메라는 성철(최무성)과 미숙(김여진) 그리고 기현(성유빈)에게 밀착하지 않음으로써 그들 각자의 고통을 헤치려 하지 않는다. 플래시백을 사용해 그날 계곡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은찬이네 가정은 얼마나 화목했는지 재현하지 않는 것도 인물들과의 거리 유지를 위한 선택처럼 보인다. 


신동석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위로하는 사람들도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은 사회에서 위로하려는 사람들은 신중해야 한다. 위로의 방향이 혹 자신이 향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드시 자기검열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받는 사람들은 당신이 보낸 위로라는 이름의 고통까지 해결해야 한다. 살아남으려는 사람에게 그러한 짐까지 지게 해서는 안 된다.




[chaeyooe_cimema] 

살아남은 아이  Last Child  

감독 신동석




사는 걸 넘어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해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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