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을 보고
공감한다는 말은 좀 부족하다. <82년생 김지영>의 여성 관객은 주인공 김지영의 삶에 공감하는 수준을 넘어 자기 자신과 김지영을 동일시한다. 내가 곧 김지영이다. 김지영이 곧 나다. 이런 합일의 경험은 동명의 원작 소설의 여성 독자가 이미 겪은 것이기도 하다. 말 때문이다. 김지영이 듣는 모든 말이 여자들을 자꾸 김지영의 곁에 서게 한다. 결국 김지영이 되도록 부추긴다.
아픔의 원인을 찾아서
<82년생 김지영>은 평범해 보이는 김지영(정유미)이라는 한 여성이 어째서 가끔 딴사람이 되는지 그 원인에 관심이 있는 영화다. 영화는 초점 잃은 눈을 하고서는 자신의 엄마와 외할머니, 죽은 대학 동아리 선배의 목소리를 내는 김지영을 특별히 나약하다거나 그냥 미친 여자로 판단하지 않는다.
김지영의 증상은 그가 한국 여성으로 살면서 겪은 여러 가지 환경적 스트레스에 의한 결과라고 영화는 의심한다. 2013년 대한의사협회지에 실린 논문 「스트레스와 정신질환」(이화영, 함병주 저)에 따르면 출생 전의 스트레스 그리고 출생 후의 유년기의 스트레스 및 성년기에 겪을 수 있는 생활 사건들의 상호작용은 생물학적 손상을 일으켜 개인에게 정신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부지런한 영화는 김지영의 인생 곡선을 펼쳐 발병 원인이 되었을 법한 특징적인 사례들을 솎아 관객에게 충분히 제시한다. 이때 과거 사례들은 출산 뒤 옛날 생각이 자주 나고 해가 지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 김지영의 현재 상태에 맞춰 느닷없이 시작되며 시간순도 아니다.
효도할 거라고 말하면 명랑하다는 소리를 듣고 늘 정숙을 요구받는 ‘여자애가~’ 시절부터 아무래도 오래 일하기는 힘든 ‘여직원이~’ 시절의 기억을 김지영은 떠올린다. 모두 관객석 곳곳에서 터지는 여성들의 실소를 들을 수 있는 장면이다. 뒤통수만 보아도 그들이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웃음은 잠깐이다. 도저히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는 ‘며느리가~’, ‘엄마가~’, ‘여자가~’의 폭격은 썩은 미소조차 짓지 못하게 한다.
피멍의 드라마, 정유미의 본 적 없는 얼굴
전반부를 수집한 생활 사건들을 열거하는 데에 쓴 <82년생 김지영>은 후반부에 들어 드라마에 집중한다. 관건은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었던 김지영의 복직 여부다. 김지영은 이전까지 일했던 홍보대행사의 김 팀장(박선영)이 따로 차린 회사로 복직을 준비하면서 일순간 생기를 되찾지만 출근하기도 전에 지친다.
베이비시터는 도통 구해지질 않고 시어머니는 아들의 육아 휴직 얘기를 듣자마자 댓바람에 김지영에게 전활 걸어 그를 남편 앞길 가로막는 여자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김지영은 자신의 병을 알게 된다. 눈물을 급히 훔친 뒤 “나 뭐부터 하면 돼?”하고 묻는 김지영은 씩씩하게 다시, 어딘가 갇혀있는 기분이 드는 그곳으로 돌아간다.
배우 정유미는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희망 없는 얼굴로 후반부 김지영을 연기한다. ‘상처받고 갈 길 잃은 한 사람의 상태’(「씨네21」)를 생각하며 연기했다는 배우의 마음은 이른 아침과 저녁 무렵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따금 포착되는 김지영의 얼굴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환상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공유)과 김지영네 가족은 김지영이 미친 게 아니라 아프다고 생각하고 그가 왜 아픈지도 알아주며 무엇보다 그를 적극적으로 돌보려 한다는 점에서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김지영을 대하는 정대현의 태도는 종종 코웃음을 치게 만든다. 그는 ‘원래 밝고, 웃음이 많고, TV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 곧잘 따라해 자신을 웃기곤(원작에서 발췌)’ 했던 아내가 지금은 그렇지 않아 걱정스럽고, 자신이 아내를 그렇게 만든 나쁜 남편일까 봐 두렵다.
그래서 정대현은, 팔목에 손목 보호대를 차고서 반찬통을 냉장고 안에 집어넣고 마른 빨래를 개고 딸을 안아 어르고 달래는 일을 무한 반복하는 김지영에게서 저만치쯤 떨어져 앉아 그를 향해 안쓰러운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이 정말 진심처럼 느껴져서 그런데 또 그게 그가 생각하는 최선 같아서 나는 여전히 정대현이 꺼림하다.
그러나 ‘홈 스위트 홈’의 도움을 받지 않고 김지영을 지금과 같은 단단한 해피엔딩에 안착시킬 수 있는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문학 잡지에 실린 자신의 에세이를 보고 기뻐하는 김지영의 표정과 무언가를 또 써보려 하는 김지영의 목소리를 이미 보고 들은 나는 그게 그냥 다 좋아서 김지영의 사람들도 끌어안는다. 인간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는 최은영 소설가의 말을 이들이 실현해주길 바란다.
82년생 김지영을 함께 본 엄마는 울지 않았다. 울어 눈이 빨개진 나를 보며 엄마는 너를 키우는 동안 나는 행복하기만 했다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예상치 못한 감상평에 나는 괜히 엄마가 미워져 쏘아봤는데 엄마는 아랑곳없이 곧바로 두 번째 감상평을 내놓았다. 너를, 네 또래 여자들을 절대 우리 때 여자들처럼 살게 하면 안 된다. 단호하게 한 마디 남기고서는 남은 팝콘을 입속에 하나둘씩 집어넣으며 복잡한 상영관 안을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나는 멍하니 서서 지켜보다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chaeyooe_cinema]
82년생 김지영 KIM JI-YOUNG, BORN 1982
감독 김도영
햇빛이 곱게 드는, 한국 여자가 사는 집.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 본 정유미의 희박한 얼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