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치지 않아>를 보고
마음 놓고 웃어도 된다. 이 점이 코미디 영화 <해치지 않아>의 강점이다. 등장인물들이 구사하는 유머는 자기 자신으로 한정된다. 동물 탈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인간다움과 자책 개그가 대표적이다. 누군가를 대상화하거나 타인의 약점을 코미디로 쓰지 않으니 웃음에 관한 자기 검열 압박도 줄어든다. 그래서 <해치지 않아> 관객석에서는 웃어 놓고 뒤늦게 죄책감을 느끼는 불상사가 발생할 일이 없다.
웃음보다 사람이 더
간만에 만나는 깨끗한 웃음이 반가웠으나 나의 관심은 로펌 수습 변호사 강태수(안재홍)에게 쏠렸다. 그는 클라이언트가 인수한 망한 동물원 ‘동산 파크’를 3개월 이내에 정상화한다면 원하던 M&A 팀으로 보내 주겠다는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물원장이 된다. 또한 그는 <엑시트>(2019)의 용남(조정석) 못지않은 패기를 가진 청년이기도 하다. 현재 동산 파크가 동물이 부족해 당장 재개장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간밤 호랑이 박제를 보고 식겁한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직원들에게 동물 탈을 쓰고 동물인 척하자는 제안을 한다.
몸이 움직이게 하는 강태수의 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강태수는 되게 한다. 이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며 여러 번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수의사 한소원(강소라)은 집에 돌아와 사자처럼 납작 엎드려 방바닥을 기어 다닌다. 사육사 김건욱(김성오)는 불만에 쓰던 에너지를 헬스장에서 고릴라다운 육체를 만드는 데에 쏟아붓는다.
강태수의 말이 변화를 이끈다. 그는 미래지향적인 말로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는다. 이를테면 오직 연습만이 살길이라며 직원들이 막판 연습 스퍼트를 내게 한다. 실전 투입 하루 만에 단체로 녹초가 되자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한다. 관람객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면 다가가 자신감을 가지라고 다독인다. 확신에 찬 새 원장의 진두지휘 아래 직원들은 각자의 구역에서 자리를 잡는다.
어쩔 수 없이 열정!
강태수가 갑작스레 열정맨이 된 것이 아니다. 이미 그는 과장된 몸짓과 긍정 화법에 익숙하다. 로펌으로부터 동물원 운영 상황에 관한 전화가 걸려왔을 때 강태수는 핸드폰을 부여잡고 큰 소리로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북극곰 탈을 처음 쓰게 된 순간에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할 수 있다고 자기 최면을 건다.
강태수가 이토록 열정이 체질이 된 까닭은 불안정한 고용 상태와 관련 있다. 현재 강태수는 국내 3대 로펌 중 한 곳의 변호사이지만 임시 출입증 갱신에 초라함을 느끼는 계약직 사원이다. 그는 고용 안정을 위해 회사에 잘 보이려고 애쓴다. 회사에 대한 열정은 그가 고용주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대표가 지나갔는데도 한참을 허리 굽혀 인사하고 대표에게 달려드는 시위자들을 온몸으로 막는 수모도 자처한다. 강태수는 열정을 증명하기 위해 굴욕을 당한다.
가시적 성과를 내는 것은 필수다. 동물 탈이라는 최악의 조건에서도 재개장 대박을 터뜨리려면 없던 열정까지 만들어야 한다. 강태수는 실패할 수 없으므로 실패를 생각하지 않는다. 해내야 하고 잘 될 것이며 대표님이 걱정하실 일은 생기지 않는다. 강태수는 항상 두 눈을 부릅뜨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자세로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말씀만 하시면 곤란하죠, 원장님
반면 동산파크 직원 관점에서 상사 강태수의 열정은 그리 달갑지 않다. 직원에게 무조건적인 최선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강태수는 자기 삶의 방식대로 직원을 관리한다. 매번 그는 여러분이 열심히만 한다면 동물원을 살릴 수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는데 이는 곧 동물원이 잘못된다면 열심히 하지 않은 여러분 탓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강태수는 원장인 자신을 믿어달라고 말하면서 책임은 직원 개개인에게 전가한다. 결국 현재 원장의 채근으로 무리하던 이전 원장(박영규)은 쓰러진다.
후반부에 동산 파크는 대성공을 거두고 강태수는 이후 풍파에도 직원들의 고용 문제를 끝까지 책임지는 선택을 한다. 해피엔딩은 피고용인이자 상사 강태수가 한 말과 행동을 자연스럽게 덮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자꾸 할 수 있다고 소리치던 강태수의 얼굴이 마음에 걸린다. 열정맨 강태수는 마냥 웃기지 않는다.
[chaeyooe_cinema]
해치지 않아 Secret Zoo
감독 손재곤
웃으며 입장, 산뜻하게 관람, 헛헛하게 퇴장.
[★★★]